사람 아닌 온도계에 에어컨 쐬는 건 단순한 꼼수가 아니다

정광혁 2025. 8. 15.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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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노동자의 감각을 부정하려 드는 '측정의 권력'... 부정된 몸들, 그 안의 온도계를 재야 한다

[정광혁 기자]

혹시 온도계 안 써본 사람 있는가? '왜 뜬금없이 온도계 얘기냐'고 물을 법 하다. 일상 곳곳에 있는 온도계를 읽는 건 현대인의 기본 소양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직관적이면서 정확하다. 우리는 모두 온도계가 어떻게 동작하는지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고, 그렇기에 그 측정 결과를 의심 없이 믿는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는 당연하지 않다. 인류 역사는 온도계 없이 시작됐는데, 인간은 어떻게 온도계를 만들고 '감을 잡는' 수준에 이를 수 있었을까? 언뜻 쉬워 보이지만 실은 복잡한 철학적 문제다. 예컨대 섭씨 26도를 가리키는 기온계를 보고, 그것이 정말 사실인지는 피부의 감각으로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럼 다른 온도계를 가져와 확인하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결과가 똑같다 한들 문제는 여전하다. 결국 또 다른 온도계를 가져와야 하고, 이를 계속하려면 무한한 온도계가 필요하다. 순환 논법에 빠진다.

섭씨의 정의를 아는 예리한 독자라면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물의 어는점과 끓는점은 고정이니, 두 지점만 표시하고 그 사이에 눈금만 잘 그으면 되지 않나?' 타당한 지적이나 의문은 꼬리를 문다. '그러면 물의 어는점·끓는점이 고정임은 어떻게 알지?'

과학철학자 장하석은 책 <온도계의 철학>에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옛날 과학자들의 문제 해결 방법을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온도계의 영점을 잡기 위한 첫 번째 기준은 우리 몸의 감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 손을 찬물에, 다른 손을 더운물에 넣었을 때 무엇이 더 차고 뜨거운지를 인식하는 신체 감각은 인간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표준이기 때문이다.

실제 온도계의 초기 형태인 온도경은 온도에 따른 신체 감각과 유체 부피의 변화 간 상관관계에 기반해 제작됐다. 온도계의 기원을 파고든 곳에 우리 몸의 감각이 있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사람보다 일관되고 정확한 결과를 내놓는 온도계지만 기원은 신체의 감각이다. 온도계를 통해 우리 인식이 확장되고 교정될 뿐, 온도계가 인간의 감각을 대체하거나 평가절하하지 않고 그래서도 안 된다.

몸들이 내는 고유한 목소리를 들어야
 에어컨 송풍기 밑에 자리한 온습도계
ⓒ 정성용 지부장 페이스북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 원리가 거꾸로 적용되곤 한다. 폭염이 기승이었던 최근 쿠팡 물류센터에는 송풍기의 시원한 바람을 사람이 아닌 기온계 방향으로 쐬는 일이 있었다.(https://omn.kr/2eu9u) 보도에 따르면, 이는 지난달 17일 시행된 개정 산업안전보건법 때문으로, 규정에 따르면 작업장의 체감 온도가 33도 이상으로 측정될 때 2시간당 최소 20분의 휴식이 의무화된다.

우리는 이런 법을 만듦으로써 사람의 몸이 그 정도 더위에서 계속 일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합의한다. 그 몸은 추우면 춥다, 더우면 덥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쿠팡이 노동자가 아닌 온도계에 에어컨을 쐴 때, 그건 한순간의 꼼수가 아니다. 비용 절감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도 아니다. 노동자가 느끼는 몸의 감각을 부정하려 드는 것, 그게 핵심이다. "이 '객관적인' 온도계만이 맞고, 땀을 뻘뻘 흘리는 당신이 느끼는 건 틀렸어. 당신은 아직 힘들지 않으니 더 일해도 돼." 이렇게 속삭인다.

이 현실을 증언하는 목소리도 있다. 공공운수노조 전국물류센터지부 장인하 정책국장은 문제가 제기되자 사측이 온도를 제대로 재기는커녕 측정 과정을 못 확인하도록 막는 방식으로 대응했다고 밝혔다. 온도계에 숨겨진 철학과 권력을 이해한다면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측정이 권력이 될 때, 타인의 몸의 감각은 쉽게 부정되곤 한다.

그래서 이 부정된 몸들 안에 놓인 온도계를 재야 한다. 현행법 기준으로 쓰이는 체감온도와 달리, 국제적으로 널리 쓰이는 습구흑구온도(WBGT) 지표를 이용하면 복사열·작업복 등 요소를 더 충실히 담을 수 있다. 나아가 같은 온도라도 주거 환경, 작업 강도 등에 따라 각자 받는 '열 스트레스'는 달라진다. 온도계와 달리 사람의 몸은 저마다 다르게 끓는다. 그 몸들이 내는 고유한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주제넘게 노동자 대신 송풍기를 쐰 온도계는 무죄임을 밝히고, 온도계가 차지한 자리를 원래 그곳에 있어야 할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정광혁은 대학생으로 현재 KAIST 화학과에 재학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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