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고 있을수록 손해인 돈이 있다고?
[문진수 기자]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떨어지는 돈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발행 시점의 가격은 1만 원이지만 매달 1%씩 가치가 줄어든다면. 이 돈의 소유주는 어떻게 행동할까. 1달 안에 돈을 쓰려고 할 것이다. 돈의 가격이 곧 이자이고, 이자는 소비를 유예한 대가로 지급되는 보상이다. 그런데 플러스(+) 이자를 주기는커녕 마이너스(-) 이자를 물리다니, 이해하기 힘든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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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년대 오스트리아 뵈르글에서 유통된 감가화폐 (1실링) 월 단위로 화폐 뒷면에 스탬프를 붙이게 되어 있다 |
| ⓒ 위키피디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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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생회복 소비쿠폰 홍보물 대한민국 전자정부 누리집 (www.korea.kr) |
| ⓒ 행정안전부 |
흥미로운 건 둘의 차이를 구별 짓는 방법이다. 지배층은 음(-)의 화폐에서 ③저장 수단을 거세하기 위해 부정기적으로 화폐 개혁(currency reform)을 단행했다. 새 화폐를 발행해 기존 화폐와의 교환 비율을 10:9나 10:8로 가져갔다. 돈을 쌓아두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음(-)의 화폐는 어디로 흘러갔을까.
농산물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지력(地力)을 높이거나, 재화 생산에 도움이 되는 도구를 개선하는 등 '생산적인' 영역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중세 중기의 경제적 번영을 이끈 원동력이 이 이중화폐 시스템(dual monetary system) 때문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화폐의 선순환이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는데 기여했다는 뜻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하락하는 방식이 실제로 작동 가능한가. 그렇다. 독일의 킴가우어(Chiemgauer), 일본의 피너츠(Peanuts) 등 일부 지역화폐가 이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전통적인 감가 화폐는 지류(紙類)에 우표를 붙이는 방식을 써서 불편함이 많았지만, 지금은 디지털 방식을 적용하면 되기 때문에 기술적인 어려움은 사라졌다.
감가 화폐를 고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승수효과 때문이다. 승수효과(multiplier effect)란 투입된 돈이 순환하며 원래 금액보다 큰 경제적 효과를 내는 현상을 말한다. 정부가 지출한 돈이 1조 원이고 거래를 통해 소비된 돈이 3조 원이면 승수효과는 3배가 된다. 회전이 많이 이루어질수록 효과는 배가된다. 경기가 어려우니 돈을 빨리 돌게 만들자는 것이다.
화폐의 빠른 순환이 필요한 곳은 어딜까. 지역/지방이다. 인구 유출이 심한 곳일수록, 소멸의 징후가 뚜렷한 곳일수록 그러하다. 돈이 가치를 창출할 순 없지만, 돈이 빠르게 순환해 승수효과가 높아지면 지역경제에 활기가 돈다. 지역화폐(상품권)의 유효기간을 짧게 줄여 회전을 촉진하는 것이다. 돈에 가속 장치를 다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지역화폐의 유효기간은 발행일로부터 5년이지만, 지자체는 조례를 통해 기간을 단축하거나 연장할 수 있다. 어느 지자체에서 유효기간을 1년으로 줄이고 2년 차부터 매년 10%씩 감가하는 방식을 적용하기로 했다고 해보자. 한 걸음 더 나아가 유효기간을 6개월로 줄이고 다음 월부터 1%씩 가치가 하락하는 방식을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기간이 줄어든 것에 대한 부담으로 지역화폐 구매자가 줄 수 있고, 감가의 부당함을 토로하는 주민이 늘어날 것이다. 지방 의원들의 반발로 조례 개정에 난항을 겪을 수도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화폐의 유효기간을 줄이는 대신 반대급부를 제공하는 접근법을 활용하면 된다. 화폐 사용자들을 위한 혜택(incentive)을 다양화하는 것이다.
지역에는 남는 자원들이 있다. 공터, 극장, 박물관, 주민 편의시설은 늘 붐비진 않는다. 화폐 사용자들에게 이 공간의 여백을 이용할 수 있는 쿠폰(coupon)을 제공하면 어떨까. 주중에 극장이나 박물관을 이용할 수 있게 하거나, 공터를 개간해 주말농장으로 만든 후 분양하는 식이다. 비행기 빈자리를 마일리지(mileage)로 활용하듯, 지역의 유휴 자원을 활용해 수요와 보상을 연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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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여군 지역화폐 굿뜨래페이 감가형 인센티브(독서 포인트) 활용 방법 부여군청 누리집 (edu.buyeo.go.kr) |
| ⓒ 부여군청 |
고향사랑 기부금을 쾌척한 이들에게 지역화폐를 사은품으로 제공하는 건 어떨까. 유효기간이 짧으면 호응도가 낮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방문자에게 어떤 혜택을 제공하는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우리 고장을 선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기억에 남을만한 지역 탐방(tour)을 기획하는 것이다. 교류 인구, 관계 인구가 늘어나면 투입한 재정 이상의 보상을 얻게 될 것이다.
감가 화폐는 가지 않은 길이다. 지역화폐에 감가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는 것. 지역 주민이 감가 방식의 지역화폐를 구매해 사용한다는 것은 공동체성(community)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지역을 살린다는 큰 목적을 위해 작은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감가 방식의 지역화폐를 유통하는 곳은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
지난 백 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돈의 속성에서 저장 기능을 소거(消去)하자는 생각, 즉 화폐의 기능을 가치 척도와 교환 매개로 한정하자는 주장은 당대 주류들에 의해 철저히 무시당했다. 돈 가뭄을 해소하기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사용한 지역화폐들은 놀라운 효능에도 불구하고 법정화폐의 질서를 교란한다는 이유로 국가에 위해 억압되거나 강제 폐지되었다.
그 결과 돈은 인간의 심부름꾼이 아니라 신의 자리에 등극했다. 인간이 만든 것 중 썩지 않는 유일한 물건이 돈이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시간이 흐르면 녹슬고, 손상되며, 늙는다. 하지만 돈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대물림되고, 증식된다. 돈의 이런 속성은 자연의 질서에 반한다. 나무는 언젠가 성장을 멈추고 죽지만, 돈은 끝없이 성장한다.
현대의 화폐 질서는 열역학 제2법칙 즉, 엔트로피(entropy)를 증가시켜 지구 환경 파괴를 촉진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금융 자본은 무한대의 증식을 통해 환경 오염과 생태계 파괴라는 악성 폐기물을 양산하며 빠른 속도로 지구를 황폐화하고 있다. 인간의 탐욕을 먹고 자라는 이 가공할 물신(物神)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화석연료를 태우라고 종용하고 있다.
화폐의 작동 방식과 구조를 바꾸는 것. 자연을 닮은 돈을 만들어 인류에 봉사하는 수단으로 탈바꿈하려는 시도는 환경을 복원해 지구를 살리려는 시대정신과 궤를 같이한다. 돈이 곧 신인 세상에서, 신을 옥좌에서 내쫓자는 말은 불온한 사상으로 들린다. 사람들은 돈의 권능을 빼앗기는커녕 그의 발 아래 머리를 조아리며 살고 있다. 하지만 그 신은 오래전에 인간을 버렸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인간은 영혼 속에 자신을 감시하는 눈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한다. 우리 내면에 숨겨져 있는 권력의 눈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현실을 지배하는 규칙과 질서가 온당한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분명한 사실은 돈은 인간이 만든 피조물이며 따라서 언제든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문진수 기자는 사회적금융연구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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