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혈보다 두려운 성경험 고백... 만약 이들에게 언어가 있었다면

박슬기 2025. 8. 13.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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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청소년성문화센터 지침 '용어 삭제' 논란, 서울시가 지우려는 건 말이 아니라 그 존재다

[박슬기 기자]

십여 년 전, 전공의 때였다. 야간 당직 중 응급실에서 연락이 왔다. 15세 여성 청소년이 하혈을 하여 내원한 것이다. 산부인과로 연계된 청소년은 할머니와 함께였다. 성 경험은 결단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소변검사 결과 임신반응 양성이었고, 자연유산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출혈을 멈추려면 빠른 진단과 치료가 시급했지만, "성 경험이 없는 우리 손녀에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흥분하는 '보호자'의 반대로 어떤 처치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다. 그 사이에도 출혈은 계속되고 있었다. 몸의 당사자인 청소년은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할 뿐이었다.

"내 손녀를 모욕한 의사 너 따위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고성과 협박을 한참 견뎠지만 나는 끝내 설득에 실패했고, 그들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응급실을 떠났다. 그 밤 나는 한잠도 잘 수 없었다. 다행히도 두 사람은 다음날 외래로 다시 찾아왔다. 할머니는 밤새 손녀를 '잡들이'했더니 성 경험이 있는 것이 맞더라며, 이번엔 내게가 아니라 손녀를 향해 모욕하는 말들을 쏟아냈다.

그날 밤, 청소년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계속되는 출혈보다도, "성 경험이 있다"는 한마디가 더 두려웠을지 모른다. 자신의 생명까지도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도, 어쩌면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보호자'였을지 모른다. 치료 과정 내내 한치도 곁을 떠나지 않는 보호자를 어렵게 청소년과 분리시키고, 회복을 위한 설명에 이어 피임을 권고하던 참이었다. 그 순간, 이틀 내내 침묵하던 청소년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고 나와 눈을 마주치며 또렷하게 말했다.

"근데 미성년자한테 콘돔 안 팔잖아요."

서늘한 눈빛이었다. 적대감이었을까, 분노나 원망, 혹은 억울함이었을까. 그 누구도 한 번도 '내 편인' 어른(적합한 표현을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이렇게 쓴다)을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의 경계였을까. 내 건강보다 성 경험 유무가 중요해서 강제퇴원을 시킨 '보호자', 콘돔('청소년에게 판매 금지'라는 것은 법적 사실과 무관하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임의적으로 자행되고 있다)을 포함한 피임법에 대해 교육하지 않은 학교, 그리고 나 역시 그에게는 뭣도 모르면서 위선을 떨고 있는 의사 나부랭이였을 것이다. 이날 마주한 그 눈빛은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를 지켜보듯 따라다닌다.

보호하는 자는 무엇을 보호하려 하는가
 7월 24일 오전 포괄적성교육권리보장을 위한 네트워크가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포괄적 성교육 삭제 및 성소수자 표현 배제 등 퇴행적 매뉴얼 개정을 즉각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 한국다양성연구소
진료실에서 이후에도 나는 이날의 경험을 숱하게 반복해 겪는다. 성매개감염 치료를 받은 청소년에게 폭언을 퍼붓는 보호자, 성 경험을 '들킨' 청소년을 '끌고' 와서,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피임장치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보호자, 절대로 보호자에 알릴 수 없다며 임신중지 도움을 요청하는 청소년, 자신이 여성임을 받아들이지 않는 청소년에게 월경을 강제하려는 보호자. 청소년의 몸에 대한 법적 권리가 자신이 아닌 보호자에게 귀속된 현실에서, '보호'하는 자는 때로 가장 큰 장벽이 되기도 한다.

당연하게도 모든 보호자를 일반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진심과 사랑을 의심하거나 판단하려는 것도 아니며, 내게는 그럴 자격도 없다. 그럼에도 꼭 묻고 싶다. '보호'란, 대체 무엇인가? 혹시 그것은, 이 사회가 임의로 정해 놓은 '정상성'에 청소년의 몸을 욱여넣어 맞추려는 것은 아닐까? 그 기준을 벗어나는 몸과 경험에 대한 금기와 통제로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정작, 그 어디에도 '정상'인 몸이란 없다. 몸은 나 자신으로서 언제나 유일하고, 경험은 언제나 스스로의 몸에 새겨진다. 그렇다면 그 기준에 맞지 않는 몸들, 정상성 앞에서 부정되고, 숨겨지고, 억눌리는 몸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혹은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처럼 규정되는 몸들은 어떻게 될까? 보호라는 이름으로 부정당한 몸들은 자신의 몸에 불안과 공포를 새기고, 스스로를 의심하고, 부끄러워하고, 침묵하게 된다. 결국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스스로를 부정하게 된다. 이것이 정말 '보호'일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좋은 보호자가 되자"거나 "청소년에게 힘이 되는 어른이 되자" 같은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다. 청소년의 몸과 삶이 누구를 만나느냐의 '요행'에 의해 결정돼서는 안 된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어떤 어른을 만나더라도, 어떤 보호 아래 있더라도 다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그 힘은 청소년 스스로에게 있어야 하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지금 당장, '교육'이다. '몸에 대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의 주인이 누구인지, 내 경험을 어떻게 말하고 다룰 수 있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이는 단지 단편적인 정보가 아니라 권리이고, 언어이고, 가능성이다.

성, 관계, 감정, 몸, 윤리, 평등에 대한 경험을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정당한 요소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 자신과 타인을 해치지 않고 그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 스스로의 존재를 지켜나갈 수 있는 것. 전 생애를 아우르는, 자신의 몸에 새겨지는 삶을 스스로 영위하기 위한 교육. 우리 사회는 그 절실한 필요성을 오래도록 치열하게 고민해 왔고, 한걸음 한걸음씩 함께 다지며 만들어 왔다. 그 길의 이름이 바로 '포괄적 성교육'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서울시는 이 길에 '퇴행'을 지시했다. '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 운영 매뉴얼'을 통해, '포괄적 성교육'과 '섹슈얼리티'라는 용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연애', '포궁', '성소수자' 등은 다른 단어로 대체하라는 지침을 내린 것이다.

말을 없애면 존재가 사라진다고 믿는 폭력
 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 운영매뉴얼 제작 TF 회의결과.
ⓒ 서울특별시
말을 없애면 그 존재 자체도 없앨 수 있다는 발상은, 착각일 뿐 아니라 이미 심각한 폭력 그 자체다. 포괄적 성교육을 금지하면 모든 몸이 허구적인 정상성에 결집되는가? 섹슈얼리티라는 단어를 가리면 성적 실천이 없어지는가? 성소수자라는 언어를 지우면 성소수자가 사라지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섹슈얼리티라는 말 때문에 성적 실천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성소수자라는 이름 때문에 존재가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 언어들이 없던 때에도, 이 몸들은 존재했고, 이 몸들이 겪는 경험들이 있었다. 이 모두를 배제하고 삭제하려는 폭력에 맞서 우리 사회가 함께 쌓아올린 지금의 토대를 위협한다고 해서, 이 몸과 경험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미 존재하는 몸들을 부정하고 삭제하려는 시도는 과연 무엇을 하는가? 경험을 수치심으로 바꾸고, 존재를 침묵으로 몰아넣는다. 세상 밖으로 밀려난 몸들은 더 깊이 고립된다. 교육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교육의 부재를 통해서도 사람은 길들여지고 해침을 당한다.

그것이야말로 지금 서울시가 하고 있는 일이다. 단지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지우는 일. 폭력을 되풀이하게 만드는 사회적 조건을 의도적으로 공고하게 유지하는 것. 존재를 없애는 교육은 없다. 다만,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만이 있을 뿐이다. 서울시의 이번 지침은 이미 '교육'이 아니다. 오직 고통만을 곱절로 가중시킬 폭력의 시스템일 뿐이다.

건강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몸의 경험을 말할 수 없는 응급실의 청소년. 성매개감염 치료를 받은 청소년에게 쏟아지는 욕설. 성 경험을 들킨 '죄'로 자신의 몸에 원치 않는 피임장치를 강요받는 청소년. 여성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여성 되기'를 강제당하는 몸. 이들에게 교육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존재가 무너지지 않을 언어와 힘이 있다면 어땠을까.

잊히지 않는 그때 그 청소년의 눈빛은 단지 나만을 향한 것은 아니었을 테다. 이 사회가 부여하지 않은 권리, 가르치지 않은 언어,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경험을 감당해내고 있는 한 존재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만난 이들은 과거형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하며, 서울시가 원하는 역행의 길에서 더욱 깊어진 고통과 고립을 감당해야 할 이들이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 묻고 싶다. 교육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사회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지금 불어오는 이 반동의 광풍은 보호도, 교육도 아닌, 오직 폭력일 뿐이다. 청소년이 스스로의 몸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를 근본부터 박탈하려는 시도다. 어떤 존재를 허락하고, 어떤 존재를 지워낼지를 권력으로 공표하는, 일방적인 으름장이다.

그리고 그 으름장은 청소년만을 겨누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길을 낼 것인지,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지를 묻는 지금, 모두의 응답이 필요한 시점이다. 누군가를 자신 그대로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 누군가를 힘으로 지워내려는 사회라면, 그 물음은 결국 우리 모두의 것이 된다.

청소년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분투해 왔던 시간들, 그 모든 노력은 결국 우리 모두가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다는 열망의 다른 이름이었다. 서울시의 이번 지침은 그 시간을 거꾸로 되돌리려는 시도다. 서울시가 지우고자 하는 것은 단지 말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다. 그러나 존재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존재를 지키기 위해 축적해 온 시간과 싸움 역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산부인과 전문의이며, '언니들의 병원놀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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