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전시관의 부적절한 전시물, 아이들이 볼까 두렵다
[서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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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전 근현대사 전시관 모습. 옛 충청남도청 건물로, 과거 대전의 랜드마크이자 중심이었다. 지금도 중구청과 중부경찰서 등 관공서가 밀집해있다. |
| ⓒ 서부원 |
전시관부터 대전역에 이르는 중앙로 일원에서는 '0시 축제'가 열리고 있다. 차량이 전면 통제된 채 광복절 연휴가 끝나는 주말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나날이 쇠락해지는 구도심의 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지방자치단체의 프로젝트였다가 대전광역시 주관 행사로 덩치를 키웠다.
전시관은 옛 충청남도청으로 쓰였던 건물이다. 지난 2012년 충청남도청이 흔히 '내포 땅'으로 불리는 홍성군 홍북읍으로 이전하면서, 대전의 근현대사를 소개하는 전시 공간으로 재개관했다. 과거 대전의 중심으로, 지금도 중구청과 중부경찰서 등 관공서가 주변에 밀집해 있다.
대전은 인구 규모로 치면 현재 우리나라의 5대 도시 중의 하나이지만,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존재하지 않던 도시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전까지만 해도 '대전리(里)'라는 이름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이다. '한밭'이라는 우리말이 더 어울리는 휑뎅그렁한 빈터였다.
대전엔 딱히 내세울 만한 '전근대사'가 없다. 전시관의 이름 앞에 굳이 '근현대사'를 수식어로 내세운 것도 그래서다. 조선 후기를 풍미한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 등의 역사 인물을 여럿 배출한 곳이긴 하지만, 도시 자체가 근현대의 유산인 탓에 뒷전으로 밀려난 모양새다.
전시관의 알짬은 1층에 있다. 행사 도우미들은 연신 2층부터 관람하라고 안내하지만, 그곳엔 온통 아이들을 위한 공간뿐이다. 체험 놀이를 끝내고 1층으로 내려와 '유성 온천 모형관'을 본 뒤 건물 바깥에 마련된 야외 정원을 거쳐 전시관을 빠져나가도록 동선이 설계됐다.
정작 대전의 근현대사를 개괄하는 전시실은 아이들로 북새통인 2층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한산한 모습이다. 도시의 역사를 기록한 텍스트 위주의 전시실엔 해설사 한 분만 상주하고 있었다. 작은 화면의 기록 영상은 흑백 필름이어선지 아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지 못했다. 명색이 근현대사 전시관인데, 아이들이 역사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체험만 하고 되돌아가는 셈이었다.
전시관은 대전의 근현대사를 품은 사실상 유일한 건물이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져 도시 전체가 폐허로 변한 6.25 전쟁 중에도 폭격을 피해 살아남았다.
전시관은 근대도시 대전의 탄생(경부선 철도부설과 일본인 집단이주)- 항거(만세운동 등 독립운동사)- 6.25전쟁(민간인 학살 등 피해과 폐허가 된 대전 )-대전의 재건과 3.8민주의거- 대한민국 새로운 중심도시 대전(과학연구단지 등) 순으로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명과 암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일부 전시의 경우, 당시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주마간산 격으로 전시물을 보고 읽었다간 자칫 그릇된 역사 인식과 편견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들었다.
일부 그릇된 역사가 버젓이
우선, 경부선 철도의 건설로부터 시작된 대전의 근현대사가 미화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대전의 근현대사는 '발전'이나 '성장'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끌어다 쓸 수 없는 식민지 침탈의 수난사다. 친일과 6.25 전쟁을 빼놓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역사다.
과거 대전보다 더 유명했던 유성 온천은 친일파와 깊숙이 관련되어 있고, 어느덧 도시의 상징이 된 성심당 빵집의 역사는 6.25 전쟁과 무관치 않다. 전후 미국의 구호물자로 들어온 밀가루 두 포대가 성심당의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둘은 지금 열리고 있는 '0시 축제'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성심당이 문을 연 1956년은 대전의 역사에서 여러모로 상징적인 해다. '0시 축제'라는 독특한 명명도 1956년 발매된 가수 안정애의 노래 <대전 부르스>의 '대전발 0시 50분'이라는 노랫말에서 착안한 것이다. 당시 대전역에서 목포로 가는 완행열차를 모티브로 한 이별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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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회 충청남도 통상 평의회 기념 촬영 사진. 아무런 설명이 없어, 자칫 이들이 대전 근대화의 주역으로 착각할 가능성이 크다. 사진 아랫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에 두루마기 차림이 악질 친일파 김갑순이다. |
| ⓒ 서부원 |
문제는 사진 옆에 간판처럼 적혀 있는 '대전, 근대를 걷다'라는 글귀다. 사진 속 인물들은 일제에 부역한 친일파들로 마치 그들이 대전을 근대화한 주역인 듯 묘사되어 있다. 일제의 수탈이 낙후한 조선을 발전시켰다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강조하는 듯해 불쾌했다.
친일파가 왜 여기에
그중에도 사진 속 악질 친일파 김갑순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는 건 자못 충격적이었다. 그는 '충청도의 이완용'이라고 불릴 만큼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치부하며 권세를 누렸던 자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곧장 풀려난 뒤 89세까지 살았다.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자 708명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그가 지낸 벼슬은 이완용에 버금갈 만큼 화려하다. 부여군수와 공주군수 등 충청도 내 군수직을 두루 거쳤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국민정신총동원연맹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을 역임했다. 말 그대로, '일본인보다 더 일제를 위해 헌신한 조선인'이었다.
국권 피탈 후 그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수리 사업에 협력하며 충청도의 땅을 사들였다. 일제의 비호 아래 금융업과 운수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면서 조선의 내로라하는 갑부가 됐다. 경부선과 호남선이 교차하는 대전 땅의 절반 가까이가 그의 소유였다고 전한다.
유성 온천이 본격 개발된 것도 그즈음이다. 1919년 무렵, 유성 지역에서 일본인 학자에 의해 온천이 발견되었고, 일본의 온천욕 문화를 식민지 조선에 이식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인근에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그에게 유성 온천 개발 사업은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됐다.
그가 일제로부터 받은 훈장만도 숱하다. 다이쇼 일왕과 쇼와 일왕이 즉위할 때마다 기념 훈장을 받을 정도였다. 태평양 전쟁 등 일제는 필요할 때마다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막대한 국방헌금으로 응답했다. 일제강점기 천정부지로 뛴 땅값에 견준다면 푼돈이었을 테다.
역대 대통령이 머물다 간 '313호실'까지 복원해서 유성 온천이 대전 발전의 초석인 양 표현하고 있다.
아이들이 볼까 두렵다
사진만 덩그러니 걸려있는 '대전, 근대를 걷다' 너머론 6.25 전쟁 이야기가 이어진다. 알다시피, 대전은 전쟁의 와중에 전국 최대 규모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는 산내 골령골(곤룡골) 학살터가 넘어지면 코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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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 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을 다룬 영상과 설명을 한 관광객이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이승만 정부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한편, 좌익에 의한 우익의 학살을 끼워넣는 피장파장의 논리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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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김갑순과 같은 친일파들은 미소 냉전과 좌우가 대립하는 정세를 활용하여 자신의 친일 행위를 세탁하려 했다. 친일파는 생존을 위해 반공의 기치 아래 미국의 편에 섰고, 전쟁 전후 좌익 척결에 앞장섰다. 6.25 전쟁을 '친일파들의 해방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아무런 설명 없이 전시실을 둘러본다면, 악질 친일파 김갑순이 '근대화의 역군'이 되고, 민간인 학살은 냉전과 좌우 대립 상황에서 불가피했던 일로 여겨질 듯하다. 광복 80주년을 앞둔 지금, 부적절한 내용을 담은 전시를 지방 정부의 이름으로 하고 있다는 게 놀랍다. '0시 축제'로 들뜬 아이들이 행여 보게 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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