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사이임에도 비밀로... '말뚝이' 백완승의 '그날'
민청련동지회에는 민청련 활동 중 정권으로부터 당한 폭압의 결과로 활동 중 혹은 그 이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많은 이들이 있다. 그 분들의 치열했던 삶의 흔적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민주항쟁 정신의 계승에 작으나마 보탬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민청련 두꺼비 열전]을 편찬한다.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 아닌, 무명의 헌신을 실천한 이들을 위주로 한다. 이름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헌신과 열정을 보여주는 삶의 스토리를 통해 민주항쟁의 정신을 기억하는 것이 목적이다. <기자말>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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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완승은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 탈춤극 ‘궁정동 말뚝이’를 만들어 수십 차례 공연했다. 말뚝이 분장을 한 모습 |
| ⓒ 이상원 |
백완승은 대학 3학년 때부터 추진해온 일이 하나 있었다. 가리봉동 야학을 하면서 우연히 도시산업선교회에서 하는 집회에 가서 '진오귀굿'을 관람했다. 그는 온몸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백완승은 '운동'이라는 것이 지식인들이 선호하는 이론, 이념, 학습 이런 것들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노동 현장의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문화'가 필요하고, 특히 서로 몸을 부대끼며 '놀이'를 하는 과정이 중요했다. 그것이 바로 당시 대학가에서 유행하던 '탈춤'이었다.
당시 고대에는 탈춤을 하는 문화패가 없었다. 백완승은 고대에 문화패를 조직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 그래서 민속학연구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민속학연구회를 공식 서클로 등록하는 일은 학교당국과 수사당국의 벽에 막혀 이루지 못했고, 그러던 와중에 시위 주동으로 구속되고 말았다.
풀려난 백완승은 다시 이 일에 전념했다. 때마침 10.26사건 이후 대학가에서는 학생회 부활을 추진하는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고, 1980년 봄 학기가 되자 민주화를 위한 집회와 시위가 대학가를 휩쓸었다.
백완승은 민속학연구회를 이끌고 박정희 정권을 풍자하는 '궁정동 말뚝이'(궁정동은 박정희가 시해당한 청와대 인근의 안가가 위치한 곳)라는 제목의 창작 탈춤극을 만들고 각종 집회와 농성장 현장에서 공연을 했다. 주인공 말뚝이는 주로 백완승이 맡았다.
1980년 5월에만 무려 30회 공연을 할 정도로 쉴 틈이 없었다. 특히 1980년 5월 15일, 그 유명한 '서울의 봄' 서울역 앞 시위가 이루어진 날에는 각 대학이 학교에서 출정식을 한 뒤 가두로 진출해서 서울역 앞까지 행진했다. 이날 고대 출정식은 정문 앞 광장에서 열렸는데, 학생 1만 명에 전투경찰 1만 명 도합 2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백완승이 연출한 '궁정동 말뚝이'가 공연됐다. 백완승 인생 최대의 공연이었다. 지금도 고려대 민주동문회에서는 백완승은 '백대장' 혹은 '말뚝이'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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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년 5월 16일, 고려대생들은 학교에 모여 5.16장례식을 거행했다. 행진 뒤편에 백완승이 만든 상여가 보인다. |
| ⓒ 고려대학교민주동우회 |
백완승의 전성시대도 잠시, 다음날 5월 17일 '계엄 전국 확대'로 전두환의 쿠데타가 실행되고 수사관들이 백완승 집을 덮친다. 백완승은 아파트 베란다에 있는 작은 창고에 숨어 위기를 모면한다. 다시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집요한 수사관들은 가족들을 닦달했고, 먼 외가 친척집에 숨어 있던 백완승은 검거되고 만다.
당시 고대 출신으로 신계륜, 박계동, 조성우, 설훈 등 많은 이들이 수배되었던 상황에서 백완승이 가장 일찍 잡혔다. 단연히 백완승에게 나머지 사람들의 소재를 대라고 추궁했고, 모른다고 하자 고문이 시작되었다.
거꾸로 매달아 놓고 코에 물을 붓는 최악의 물고문도 당했다. '통닭구이'라는 고문이 있다. 철제 책상 두 개 사이에 대를 걸쳐놓고, 두 손을 뒤로 묶은 뒤 그 대에 끼워서 매달아 놓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고통 끝에 죽음의 그림자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백완승의 몸이 퉁퉁 부어오르자 매다는 것도 어려워졌다. 그러자 아예 널브러진 백완승을 책상 위에 눕혀놓고 그 몸 위에 올라가 발로 밟았다. 머리는 책상 끝 밖으로 밀려 제껴졌는데 그 얼굴에 수건을 덮고 물을 부었다.
몸이 성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때 흉골이 부숴져 조각이 났다. 나중에 교도소로 이감되었을 때 지속적으로 가슴에 통증이 왔다. 물고문을 받을 때 숨이 차서 코로 물이 들어간 적이 있는데 그때 폐에 물이 차서 그런가 했다. 나중에 석방되고 전문의에게 검진을 받고 비로소 흉골이 부러진 것을 알게 되었다.
치료 과정도 백완승 다웠다. 의사는 부숴진 뼈들을 와이어로 묶어 고정시키고 6개월 동안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백완승은 자신이 누워 있는 동안 누군가가 자신의 대소변을 받아내야 한다는 걸 견딜 수 없어 했다. 그렇게 치료해서 나아지는 게 뭐냐고 물으니 미용상 처진 가슴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구부정한 어깨도 교정된다고 했다. 그까짓 것 괜찮으니 신경 몇 줄 끊어서 통증만 완화시켜달라고만 하고 그냥 지내기로 했다. 이 또한 그 이후의 백완승만 보아온 이들에게 비친 그의 외모가 그러했던 이유일 것이다.
고문으로 망가진 몸에 대한 보상을 받을 길이 열렸다. 1990년에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백완승과 남편 박강희 모두 해당자가 되어서 전라남도 광주로 신청을 하러 갔다. 큰 강당 같은 곳에서 건강 검진을 하는데, 외견상 이상이 없으면 해당이 안 된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이 떼 쓰면서 버텨야 들어준다고 하고, 담당자들은 정밀검사는 조선대 병원으로 가서 한다고 했다. 금식하고 오라고 해서 쫄쫄 굶고 왔는데, 이리가라 저리가라 하고 마냥 기다리게 하고 신경질이 났다. 이때 두 부부가 나눈 대화는 이랬다. 먼저 남편 박강희가 말했다.
"야, 가자. 이 돈 받으면 평생 거지로 살 것 같다. 우리가 이거 받으려고 그리 살았나 싶다."
"그렇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 제대로 인정을 받아야 되는 거 아니야?"
"이 돈 받고 거지로 사느니 우리가 벌어서 살자."
"자신 있지? 그럼 그러지 뭐."
이렇게 백완승 부부는 '쿨'하게 광주 보상금을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나중에 당국에서 제멋대로 최저 수준으로 보상금을 책정했다는 것을 통보받았다.
뽀글이 아줌마로 변장하다
백완승과 박강희의 결혼 스토리도 백완승의 기질을 잘 보여준다. 1980년 5월, 백완승은 성북경찰서에서 조사받고, 계엄 시기라서 수도경비사령부로 이첩되었다. 그때 줄줄이 엮여서 법무관실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나오던 중 다른 학교 학생들이 역시 줄줄이 엮여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지나쳤는데 왠지 이상해서 뒤를 돌아봤다. 줄 속에 유난히 키가 작고 여리게 생긴 남자 애가 있었는데, 너무 약하게 보여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한양대학교 학생 박강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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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3년 결혼한 백완승과 남편 박강희 |
| ⓒ 민청련동지회 |
백완승은 "도대체 나에게 결혼해달라는 이유가 뭐냐. 난 너무 황당하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박강희의 대답이 또 걸작이었다. "난 머리털 나고 여자한테 술 얻어 먹은 건 네가 처음이다.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백완승은 "그렇게 치면, 나는 두 트럭 하고도 반이 넘는 남자랑 결혼해야 된다. 고대 다니면서 나한테 술 한잔 못 얻어먹은 병신 같은 새끼는 고대 안 다닌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그냥 가"라고 받아넘겼다.
사실 박강희는 친형 박경희가 '운동권'이었고, 그는 서울 광화문에서 사회과학 서점 '논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박강희도 그러한 영향을 받아서 당시 민중불교운동연합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백완승은 잠시 운동에서 떠나 있으라는 가족의 간곡한 설득에 따라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백완승은 왠지 도피하는 느낌이어서 내켜하지 않았다. 그런 백완승에게 결혼은 적절한 탈출구였다. 이렇게 해서 만난 지 얼마 안 된 1983년 3월 둘은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 사이에서도 민청련 창립식 '보안'을 지키다
결혼을 하면서 둘은 약속했다. '가사노동은 철저하게 반씩 부담한다', '남편의 수입이 전혀 없어도 절대 바가지 긁지 않는다'. 결혼하고 보니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특히 각자 활동하는 분야가 달라서 충돌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래서 또 약속했다. '상대의 활동 분야를 존중하고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이 약속은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지켜진 듯하다. 지금도 박강희는 백완승이 생전에 어떤 활동했는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지 못하다.
신혼 초인 1983년 9월 30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이 결성된다. 민청련은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사회에 진출한 이들이 전두환 독재정권에 맞서 사회인으로서 공개적인 정치투쟁을 펼치기 위해 결성한 단체였다. 공개 투쟁을 내걸었으므로 집행부는 공개적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정권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회원 조직은 각 출신 대학별로 비밀조직으로 운영되었다. 각 대학별, 학번별 조직 단위를 계모임을 빌어서 '계반'이라고 불렀다. 백완승은 '고대 계반', 박강희는 '한양대 계반'에 속해 있었다.
1983년 한국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 앉아 있었다. 광주 항쟁이 군부의 탱크 아래 무참하게 짓밟히는 것을 목격한 운동권은 그 공포에 위축되어 함부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에 돌파구를 내려 한 것이 민청련 창립이었다. 공개적인 창립 행사는 경찰에게 가로막힐 것이 너무도 자명한 일이어서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했다. 당일 참석할 회원들에게조차 당일 오전에 점 조직에 의해 은밀하게 전달될 것이었다. 회원들에게는 장소가 사전에 유출되지 않도록 보안에 특별히 신경을 쓰라는 지침이 내려졌다.
이렇게 해서 1983년 9월 30일 오후 6시 무렵, 서울 성북구 돈암동 인적이 드문 주택가에 있는 가톨릭 수도원에 사람들이 한 둘씩 모여들었다. 베네딕트 수도원이 운영하는 상지회관이었다. 그렇게 보안에 신경 썼음에도 창립식이 열리기로 한 저녁 7시가 되자 상지회관 일대는 경찰에 포위되었다.
상지회관에 이르는 골목에 백완승이 나타났다. 당시 임신 6개월이어서 배가 많이 부른 상태였다. 경찰이 "어디에 가느냐?"고 묻자 태연하게 "저기 친구 만나러 간다"고 둘러댔다. 경찰도 설마 만삭의 부인이 집회에 참석하러 간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통과시켜 주었다. 그는 진을 치고 있던 경찰 기동대 사이를 유유자적하게 걸어서 회관 안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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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년 민청련동지회 회원들과 시민교육 활동을 하던 당시의 백완승 |
| ⓒ 민청련동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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