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약 직전 그가 남긴 말 "나라를 내 집처럼 걱정했노라"
[문운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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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능주 영벽정 계절따라 변모되는 연주산의 경치를 맑은 지석강물에 투영되어 운치있게 바라볼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연주산 아래 지석강변에 위치.2층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형이다. |
| ⓒ 문운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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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벽정 왕버들 나무 |
| ⓒ 문운주 |
이번 여정은 강이 품어온 역사와 그 물길 위에 켜켜이 쌓인 사람, 그리고 시간을 따라가 봤다.
능주의 역사 담은 '돌 기록관'
하천의 길이는 70여km 남짓이지만, 그 안에는 수천 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거대한 고인돌 무덤들, 남평 문씨 시조 문다성의 이야기를 품은 문바위, 장연서원, 그리고 기묘사화로 유배된 조광조가 생을 마감한 능주 유배지까지…
여름의 끝자락, 광주국립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길은 붉게 물든 배롱나무 터널이다. 탐스러운 꽃송이 사이로 통통하고 매끈한 줄기가 오랜 세월의 숨결을 품은 채 서 있다. 꽃길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서며 이날의 여정이 시작됐다.
전시실에서 마주한 청동기의 빛은 숨이 멎을 만큼 찬란했다. 날이 선 동검, 고리마다 울림이 전해질 듯한 방울, 태양처럼 정교한 무늬의 거울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화순 대곡리 출토' '국보'라는 안내 글자가 선명했다.
지석천을 끼고 번성했을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 문화는 중국의 전국 시대, 서양의 초기 철기 시대(그리스 고전기 말기에서 헬레니즘 시대 초입)와 맞물린다. 이 유적은 이 강이 오래전부터 삶터이자 문화의 무대였음을 말해준다. 그 놀라움을 안고 그 무대의 한 자락인 화순 능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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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충각 임진왜란과 을묘왜란에서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킨 세 충신 최경회, 문홍헌, 조현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각 |
| ⓒ 문운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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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충각 유성증 목사(1640.4~10 재임)의 인화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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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충각은 임진왜란과 을묘왜란에서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킨 최경회, 문홍헌, 조현 세 충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각(효자, 열녀, 충신 등 모범적인 인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우는 건축물)이다. 흥미롭게도 세 사람을 한 건물에 모시는 대신, 각각 별도의 맞배집에 현판만 걸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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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려유허지(정암조광조 유배지』 조선 중기 성리학자이며 개혁주의자였던 엉암 조광조가 1519년 기묘사화로 인해 유배되어 사약을 받았던 곳 |
| ⓒ 문운주 |
삼충각에서 느낀 충절의 기운은 영주산 자락으로 이어졌다. 중수서원과 영벽정을 지나면, 또 다른 절개의 상징인 정암 조광조 유허지가 나타난다.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로 권신들의 탄핵을 받은 조광조(1482~1519)는 능주로 유배되었다. 성균관 대사성과 홍문관 부제학을 거치며 개혁 정치를 이끌었으나, 훈구 세력의 모함에 밀려 하루아침에 낯선 고을의 초가로 내려왔다.
화살 맞은 새 같은 이 몸을 누가 가련타 하리,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늙은이 마음이라 절로 웃음이 나네.
고향의 원숭이와 학은 내 돌아오지 않음을 비웃겠으나,
엎은 동이 속에 든 몸이라 빠져나올 수 없음을 그들이 어찌 알리오
- 조광조 능성(능주)적중시 (번역)
그가 능주에서 지은 '능성(능주)적중시'는 날개 꺾인 자신의 신세를 '화살 맞은 새'에, 빠져나올 길 없는 현실을 '엎은 동이 속의 몸'에 빗댄 시다. 이미 모든 것을 잃었지만 체념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허탈한 웃음과 담담한 자기 성찰로 억울한 처지를 그려냈다. 절망 속에서도 기개를 지킨 선비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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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암 조광조 유허비 1667년(현종8년)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동춘당 송춘길이 글씨를 쓰고 능주목사 민여로가 비를 세웠다. |
| ⓒ 문운주 |
임금을 어버이같이,
나랏일을 내 집 일같이 걱정하였노라.
밝고 밝은 횃불이 세상을 굽어보니
거짓 없는 이 마음을 훤히 또 비추리
- 조광조 절명시(번역)
이 절명시는 조광조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임금과 나라를 향한 변함없는 충정을 품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마음은 개인의 억울함보다 백성을 향했다. 그 불씨는 끝내 꺼지지 않았다. '밝고 밝은 횃불'의 이미지는 세상을 비추는 정의와 진리의 상징이자, 그의 삶을 지탱한 신념이었다.
중종 14년(1519) 12월 20일, 능주로 사약이 내려졌다. 조광조는 명을 받들어 사약을 마시며 향년 39세로 생을 마감했다. 개혁의 길은 권세가들의 모함 앞에 멈췄지만, 그가 남긴 뜻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양팽손은 자신의 안위도 잊은 채 그의 마지막을 지켰다. 시신을 직접 염습하고 중조산에 안장한 뒤, 제향을 이어갔다. 두려움에 멀찍이 서던 일이 흔하던 시대다. 그는 오히려 한 걸음 더 다가가 벗의 죽음을 끝까지 책임졌다. 그 의리와 용기는 세월이 흘러도 빛을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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