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한라산에 두른 '수탈 머리띠'를 걷다
[안호용 기자]
지난 7월 7일, 아침부터 제주 서귀포 시내 도로는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다. 일주일째 그랬다. 건물 그늘을 찾아 밟으며 간신히 동문 교차로에 도착한 나는 맛집으로 정평난 김밥집에서 김밥 한 줄을 사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는 치유의 숲으로 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거의 중장년이었다. 나는 그들과 종점인 치유의 숲에서 내렸지만, 그곳으로 가지 않고 바로 옆에 있는 추억의 숲으로 들어갔다.
치유의 숲과 추억의 숲은 운영 주체가 달라 접해 있음에도 경계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숲의 형태도 전혀 달랐다. 치유의 숲엔 무장애 데크 길을 비롯한 시설물이 다양하게 설치되어 있었지만, 추억의 숲은 방문객을 위한 시설물은 거의 없었다. 조성 취지가 중산간 옛길 복원에 중점을 둔 것이기 때문에 여가를 즐길 시설물 설치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추억의 숲으로 가는 사람들은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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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년 7월 7일 |
| ⓒ 안호용 |
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20분 정도 오르면 연자골이라는 팻말과 만난다. 옛 집터이다. 두꺼운 녹색 이끼를 뒤집어쓴 집담이 집터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오래전 이곳에 김씨, 강씨 등 몇 가구가 살았다고 하는데 4.3 사건이 발발하자 토벌대의 소개령에 따라 해안가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그 사람들이 살던 집터를 보존하기 위해 기념물로 조성하였고, 또한 그들이 활동하던 동선 주변에 길을 새로 단장하여 추억의 숲이라고 명칭을 붙인 것이다.
집터 주변에는 공동으로 사용하던 말방아, 밭담, 통시 등의 터도 보존하고 있다. 그들은 화전을 하며 고구마, 마, 메밀 같은 구황작물을 재배하고 사냥과 목축도 하면서 살았다. 그들의 발자국이 남겼을 것으로 보이는 길을 따라 한 시간 정도 올라가면 능선을 가로지르는 한라산 둘레길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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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년 7월 7일 연자골 집터 |
| ⓒ 안호용 |
미국의 묵인 하에 제주는 그렇게 좌익 사냥터가 되었다. 멧돼지를 사냥하듯 중산간에 가두리를 치고 가두어 놓은 후 무차별하게 사냥을 하였다. 당시 남로당 제주도당의 군조직인 무장대는 350명에서 5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토벌대에 살해된 대다수는 중산간에 살던 양민이었다. 토벌대는 무장대에 음식과 거처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학살하였다. 또한 무장대한테 음식을 주지 않거나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로부터도 폭행을 당하고 때론 죽임을 당했다. 토벌대는 무장대를 잡기 위해 중산간 주민들을 이용하였고, 씨를 말리기 위해 정말 많은 사람을 죽였다. 어린 아이들도 죽였다.
잠깐 4.3 사건 피해자 현황을 짚고 가자면,지난해 기준 총 피해자는 1만 4822명이고 그중에는 사망자 1만 593명, 행방불명 3679명, 후유장애 232명, 수형자 318명이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중산간 주민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다. 이 숫자는 발굴과 당시 기록에 의한 최소한의 수치이고 실제로는 이보다 2배 정도는 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제주 인구의 10% 정도이다. 빨갱이 500명(혹은 350명)을 잡기 위해 남녀노소 구분 없이 1만 4천 명 이상을 학살한 것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이념적 제노사이드였다.
당시 중산간 지역은 95% 이상이 파괴되었다. 거주지와 주변 시설들도 주민들의 죽음과 함께 초토화되었던 것이다. 토벌대는 사람도 죽였지만 그들이 살던 공간도 철저하게 파괴하였다. 1954년 9월 사건이 종식된 후에도 그곳은 복구되지 않았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서 복구할 사람도 없었지만, 해안가 마을로 피신했던 사람들도 다시는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이 살던 공간은 버려지고 결국은 소실되었다. 집담과 밭담과 통시담을 이루던 수많은 돌은 무너져 흙이 쌓이고 산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그곳엔 숲이 다시 형성되고 이끼가 두껍게 끼었다. 사건 이후 1980년까지도 죽은 자들의 가족들은 연좌제에 묶여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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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년 7월 7일 편백나무 군락지 |
| ⓒ 안호용 |
임도처럼 넓은 길을 20여 분 오르니 드디어 한라산 둘레길과 만났고 오늘의 휴식처인 편백 숲이 나를 반겼다. 삼나무와 닮은 편백은 군락을 이루며 하늘로 치솟아 있고, 그 아래에는 여러 개의 평상이 놓여있다. 길가 평상 옆에 캠핑용 접이식 의자를 배낭에서 꺼내 조립을 하고 앉았다.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으로부터 생상스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가 들려왔다. 후반부였다. 그리고 잠시 후 나를 쫓아오던 몇 명의 중년 여성들이 건너편 평상에 자리를 잡고 싸 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각자 싸 온 도시락 품평회를 하면서 조곤조곤 떠들고 있었다. 그 소리들을 한쪽 귀로 흘러 보내며 싸 온 김밥을 상하기 전에 입에 욱여넣었다. 이제 김밥도 지겨웠다.
잠시 후,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부부도 떠나고, 중년 여성들도 점심을 먹은 후 곧바로 자리를 떴다. 갑자기 혼자가 되었다. 이제 이 편백 숲은 나의 독차지가 되었다. 나는 맥주 한 캔을 마신 후 의자 깊숙이 몸을 숨겼다. 투명한 하늘이 편백 가지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지만 시야가 거슬리지는 않았다. 여전히 바람 한 점도 없었고, 습한 기운도 내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엔 피톤치드가 쏟아지는 이 공간을 마음껏 즐기려고 작정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곳의 습한 공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사실 습한 공기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나는 듣던 레드 제플린의 곡을 도중에 끊고 자리를 정리했다. 이런 여유로운 시간은 사치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인적 없는 길을 걷다 만난 시대의 아픔
가벼워진 배낭을 메고 올라온 길이 아닌 한라산 둘레길을 따라 걸었다. 지난해 걸었던 트레일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식재한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삼나무 군락지를 지난 후 삼거리에서 하산했다.
10여 분 후, 올라올 때 거쳤던 사거리가 나왔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을 향해 의심의 시선을 보냈다. 치유의 숲으로 난 길이 분명한데, 인적이 없어 보였다. 임도처럼 길은 넓었지만 방치된 길이 분명했다. 당초 이 루트를 계획했기 때문에 불안함에도 나는 어둠에 싸인 그 길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괜찮을 것이다. 지도에는 분명하게 길이 나 있으니까 말이다. 폐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길은 한순간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가다 보면 치유의 숲과 만날 게다.
웃자란 무성한 수풀이 길을 덮고 있었다. 제멋대로 뻗친 나뭇가지들이 빼곡하게 하늘을 덮고 때론 길을 막기도 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길을 밟았다. 숲 스치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멧돼지들이 한바탕 광란을 축제를 벌인 듯 땅이 파헤쳐 있었다. 그 자국은 꽤 길게 이어졌다. 이곳이 그들의 놀이터인 것 같았다. 얼마쯤 갔을까, 호박돌 크기의 검은 돌이 박혀 있는 길이 앞에 나타났다. 두꺼운 이끼가 그 위에 덮혀 있었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길이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도로들 낸 게 분명했다.
바로 하치마키 도로이다. 하치마키는 일본어로 머리띠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표고버섯 재배를 비롯한 각종 임축산물을 운반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만든 임도이다. 일본인들은 이런 길을 중산간 지역에 층층이 만들어 체계적으로 임축산물을 관리하였다. 좀 전에 걸었던 둘레길도 이런 임도의 일부이다. 일본인들은 차고 넘치는 돌을 활용해 바닥에 깔고 다져 견고하게 도로를 구축하였는데 이 모두 제주민들의 노동 착취가 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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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년 7월 7일 하치마키 도로 |
| ⓒ 안호용 |
그러다가 일본이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키면서 제주는 그들의 전략적 군사 요충지로 활용되었다. 순환도로는 현재 지명으로 어승생, 한밝교, 영실, 법정악, 성판악, 수악, 관음사로 이어졌다. 현재 성판악을 지나는 516도로도 이 하치마키 도로를 확장해서 건설한 것이다. 일본군 7만 명이 제주에 주둔하였다. 제주는 오키나와에 이어 본토를 방어하는 마지막 저지선이었다. 그들은 자연적인 방어 진지인 오름을 비롯해 수많은 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물자를 운송할 때도 이 도로를 활용하였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들어설 때는 일본군은 제주를 마지노선으로 삼아 수많은 군 시설을 구축하였던 것이다. 그런 토목공사에 제주민이 동원된 것은 당연했다. 제주에서의 토목공사는 육지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힘든 노역을 필요로 했다.
생태계 재생이 진행되는 공간은 예측을 할 수 없어 두려움도 없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길을 잘 찾아 치유의 숲에 당도하였다. 삼나무 힐링 마당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숲을 즐기고 있었다. 땀을 흘리며 운동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굴곡진 긴 나무의자에 누워 자신만의 명상에 몰입하는 사람도 많았다. 누구도 그들을 제어하지 않았다. 여유롭고 평화로운 일상 풍경이었다.
치유의 숲을 빠져나온 나는 산록남로를 건너 소로를 따라 서귀포 방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시간 이상 이 길을 따라 가면 중산간 도로와 만난다. 한때 제주에 숲길 붐이 일었던 당시 누군가 많은 돈을 써서 조성한 길이 이제는 퇴락한 공간으로 남아 을씨년스럽게 눈에 치이고 있었다. 수풀로 뒤덮인 나대지를 지나면서 해발이 낮아지고 소규모 귤 과수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이로 농막과 창고들이 불규칙하게 자리 잡고 있다. 태양은 여전히 식을 줄 모르고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 있다. 저 멀리 바다와 서귀포 시내 풍경이 보였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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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년 7월 7일 산록 내림길에서 본 서귀포 시가 |
| ⓒ 안호용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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