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적 비용 들더라도, 무조건 보존해야 할 '땅 속 고대도시'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100년, 아니 70년이나 50년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나? 이 토성에서 갖는 아쉬움이다. 풍납(風納)이니, 글자 그대로 '바람 드리'다. 드리는 들판이니 '바람 벌'인 셈이다. 혹자는 사성(蛇城)의 배암이 바람으로 변환했다고 하나 글쎄다. 사성은 봉은사 부근 토성이란 설이 타당해 보인다.
풍납토성에선 주목해야 할 광경 셋이 있다. 우연과 무지, 억지와 욕망으로 분칠했어도 풍납토성이 백제의 도읍이라는 증거를 연속해서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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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홍수 이전의 풍납토성 아차산에서 바라 본 을축(1925)년 대홍수 이전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당시 행정구역은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풍납리와 몽촌리였다. |
| ⓒ 이영천(풍납토성지하보도_안내_촬영) |
첫 유적조사가 1963년에 이뤄진다. 두 번째 광경이다. 서울대 시굴 조사팀이 최초로 성안 유물포함층을 조사한다. 백제문화면 2개 층과 풍납리식무문토기를 비롯한 기원전부터 5세기까지의 유물을 확인, 하남위례성과 같은 시기에 축조된 성곽이라 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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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납토성(1960년대) 비교적 성벽 윤곽이 뚜렷하고, 성안 마을과 농경지가 가지런하다. 북성벽 옆으로 광진교가 보인다. |
| ⓒ 이영천(풍납토성지하보도_안내_촬영) |
세 번째는 한 역사학자의 집념이다. 1997년 1월 3일이다. 1960~1980년대 사이 성안이 시가지로 변모한다. 성벽을 절개해 가면서까지 토지불하를 했던 모양이다. 저급한 인식의 소산이다. 문화재 위에 단독과 연립주택이 우후죽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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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납리(1930년대) 부리도가 한강의 흐름을 가르는 동측 가장자리에 토성의 흔적이 보인다. 1925년 대홍수에 쓸린 서벽은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았다. |
| ⓒ 국토정보플랫폼_부분 |
그럼에도 그 자리엔 결국 아파트가 들어섰다. 지독한 아이러니다. 올림픽대교가 그나마 엇각으로 빗겨 간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과연 왕성일까?
왕성이라면 기본적으로 왕궁, 신전, 관청의 흔적 정도는 보여야 한다. 그게 어려우면 기와 편이나 토기, 무기 등에서 동시대 다른 유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격을 갖춰야만 최소한의 단초라도 될 수 있다.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에서 왕궁 유적이 발굴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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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당연립 터 재개발을 진행하려던 경당연립 터가 긴 시간 우여곡절을 겪고, 공원으로 남았다. 몇백 년이, 천문학적 비용이 들더라도 보존해야 할 하나의 사례를 보여 주었다. 우물 터 위에 재현된 우물 모양 수도시설이 인상적이다. |
| ⓒ 이영천 |
경당 연립 터에선, 신전으로 추정되는 전실과 본당을 갖춘 呂(여)자 모양의 거대 건물지가 발굴되었다. 그 남쪽에서 나무틀로 짠 우물이 드러난다. 신전의 정화수를 길어 올리던 우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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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마을 터 경당연립과 유사한 시기에 재개발을 시행하다, 비슷한 곡절을 겪고 공원으로 남았다. 백제 건물지에서 본 모습이다. |
| ⓒ 이영천 |
성문은 북쪽과 남쪽에 하나씩, 동쪽에 셋이고 서쪽은 불확실하다. 북쪽과 동쪽 성벽 밖으로 인공 해자를 두었다. 왕성이었다면 궁궐은 동쪽보다는 한강 쪽에 치우쳤을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성을 쌓은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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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벽(단면 실사) 몽촌토성 인근 '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풍납토성 동측 성벽의 단면 실사 모습이다. 높이 11m, 꼭대기 너비 13m, 바닥 너비는 40~50m로 들쭉날쭉하다. 판축공법으로 성을 쌓는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
| ⓒ 이영천 |
흙 성분도 주변 퇴적토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이는 지반 특성과 성벽 하중을 정확히 계산했다는 증거다. 성벽이 침하하지 않도록 성질이 다른 흙을 혼합해 사용했기 때문이다. 백제 토목 기술의 수준을 보여 주는 실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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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측 성벽 안쪽 풍납토성의 동측 성벽 안쪽의 모습이다. 주변에 퇴적된 흙과 마모된 성벽으로 인해 낮아 보이나, 실측 결과는 11m의 높이를 보여 주었다. |
| ⓒ 이영천 |
왕성 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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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납토성 모형 몽촌토성 인근 '한성백제박물관'에 재현한 풍납토성의 모형. 하남위례성 전체를 재현해 놓은 부분 중 풍납토성이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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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납토성 엇각으로 빗겨간 올림픽대교와 천호대교 사이에 풍납토성 모습이 정연하다. 강 건너로 아차산의 모습이 또렷하다. |
| ⓒ 국가유산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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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납토성 남측 성벽과 동측 성벽이 모서리 진 아래 '풍납동토성'이라는 상징을 세웠다. |
| ⓒ 이영천 |
도시 아래 묻혀 있는, 무조건 보존되어야 할 고대도시다. 풍납토성 거주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바탕에서, 보존과 복원방안을 그래서 찾아내야 한다. 그 대상이 물리적이건 심리적이건 가릴 필요조차 없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더라도 말이다. 폼페이처럼, 2000년 전의 한성백제를 되찾고 어긋난 길을 바로잡는 참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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