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자의 신념 덕분에..." 노동조합 결성 지지한 회장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5. 8. 9.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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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른] 한국유리 설립자 최태섭의 삶을 통해 본 진정한 기업가 정신

[김종성 기자]

'큰 기업의 대주주나 경영자 중에 사회적 어른이 얼마나 되느냐'는 대중의 고용안정, 소득수준, 복지 문제 등과 연관된다. 대기업의 분위기는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므로, '어른이 대기업에 얼마나 있느냐'는 대중의 전반적인 삶에 파급력을 끼친다.

사찰이나 교회에서는 독실한 신앙심을 드러내며 가난한 사람들의 손을 덥석 쥐는 기업인이 회사로 돌아가면 마인드를 신속히 전환시켜 이윤 경쟁에 몰두하고 직원을 기계 부품처럼 대하는 경우가 있다.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를 일정 수준에서 용인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풍경이지만, 어느 정도는 기업인 개인의 품성에도 기인하는 장면이다. 전적으로 체제와 제도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1995년 1월 14일 <매일경제> 기사 "유일한상 첫수상자 영예 최태섭 한국유리명예회장"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1995년 1월에 제1회 유일한상을 받은 최태섭 한국유리 설립자(당시 명예회장)는 기업인이 어른으로 존경받기 힘든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기업인 개인의 인격과 노력이 세상에 훈훈함을 줄 수 있음을 보여준 인물이다.

85세 된 얼굴 사진과 함께 그의 수상 소식을 전한 그달 14일 자 <매일경제>는 "유일한상은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을 실현한 고 유일한 박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탄생 1백 주년을 맞아 제정된 상"이라며 "최 명예회장은 국내 판유리공업을 태동시키고 발전시킨 공로자로서뿐만 아니라 교육 및 복지사업 사회단체 활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부의 사회환원에 노력해온 기업인으로 평가됐다"고 전했다.

최태섭의 생일은 1910년 8월 26일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지 나흘 뒤이자 대한제국이 문을 닫기 사흘 전이었다. 출생지는 청천강 이북의 해안 지대인 평북 정주군이다. 아버지 최운경은 상업이 아니라 농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최운경은 아들에게 자기 직업을 물려주지 않았다. 지식의숲 출판사가 발간한 <세상에 빛을 밝힌 인물 제3권 - 최태섭, 함태호, 메리 케이 애시>는 "그는 어려운 형편에도 장남에게 농사를 시키지 않았다"라며 "소학교에 보내 공부하게 했고, 주일에는 교회로 데려가 성경을 배우게 했다"고 말한다. 최운경은 소학교와 교회 학교를 통해 아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줬고 이는 아들이 훗날 기업인으로 성장하는 환경을 조성했다.

소학교 졸업 뒤인 1923년에 민족주의 학교인 오산중학교(이후의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 최태섭은 3년 뒤 8월에 학교를 수료했다. 이 학교에서 이승훈과 조만식의 영향을 받은 그는 한때는 독립운동을 위한 상하이 망명을 꿈꿨지만 1930년부터는 변호사시험 공부를 했다. 2년간의 수험 생활이 무위로 돌아간 데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는 일본제국 헌법 제1조도 영향을 끼쳤다. 일왕의 통치를 선언한 제1조를 그는 자신의 관점에서 받아들였다.

그와의 인터뷰에 기초한 1990년 1월 30일 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그는 제1조를 "천황을 신성(神聖)으로 받들어야 한다는 구절"로 이해했다. "신은 하나님밖에 없는데 변호사가 되기 위해 천황을 신성으로 받들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적성이 맞지 않는 등의 이유로 시험공부를 그만두기도 하지만, 그의 경우에는 신앙과의 충돌로 인한 갈등이 공부에 대한 집중력을 떨어트린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1990년 1월 30일 <경향신문> 기사 "사랑·믿음 실천 최태섭 한국유리 회장"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한 우물만 파는 경영전략

그 뒤 최태섭은 20대 초반 나이로 기업 경영에 뛰어들었다. 첫 사업은 1930년대 초반에 평양에서 시작한 정미소 경영이다. 처음에는 양조장 쪽에 의향이 있었지만, 교회 목사의 충고 때문에 방향을 돌렸다고 한다.

정미소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자만심에 빠지고 또 수금을 제때 못해 2년 뒤부터 경영이 악화됐다. 그런 다음, 만주에 가서 동화공창(同和工廠)을 차렸다. 1934년에 설립한 이 회사에서 비누·식용유·양초 등을 제조해 호황을 누린 그는 이를 기반으로 동업자 둘과 함께 삼흥상회라는 무역회사를 세웠다. 평안북도 철산군에 농장 백만 평을 마련할 정도로 이 사업은 번창했다.

하지만 1945년에 사회주의 군대가 이북에 진주함에 따라 그는 재산을 잃고 월남했다. 그런 뒤 남한에서 삼흥실업을 차려 홍콩·마카오에 오징어를 팔고 생고무를 수입하는 한편, 일본에서 판유리를 들여왔다. 이것이 그 뒤 한국유리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는 씨앗이 됐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 뒤에는 단무지도 팔고 고추장·생선도 팔았다. 이렇게 이것저것 다 해본 뒤인 1957년에 47세 나이로 한국유리를 설립했다. 이때부터 그는 한 우물만 파는 경영전략을 밀고 나갔다. 문어발식 경영을 지향하는 여느 대기업들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문어발식 경영은 위험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도 문제이지만, 경제력 집중을 심화시켜 양극화를 조장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형평성을 침해한다. 최태섭은 한국유리 설립 뒤에는 유리 이외의 다른 것에는 손대지 않는 외곬의 모습을 보였다.

이는 대한민국이 유리 국산화에 성공하는 계기가 됐다. 또 그의 회사를 세계 10대 유리생산업체로 도약시켰다. 한국 사회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경영전략을 수립한 결과가 그런 축복을 가져다줬다. 위 <경향신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저것 여러 분야에 진출해 성공한 사람도 있지만, 실패한 경우는 부지기수입니다. 내가 한 가지만을 고집하는 것은 누구든 한 가지 일에 열중, 정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놓으면 그것이 곧 전체가 잘되게 하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최태섭은 유일한상을 수상하기 3년 전인 1992년에 중앙대학교가 수여하는 제2회 참경영인상을 받고, 1991년에 국민훈장 목단장을 받았다. 1989년에는 김성수를 기리는 제3회 인촌상의 산업기술부문상을 받았다. 1988년에는 한국능률협회가 주는 한국경영자대상을 받았다. 그는 1977년에 대만에서 상을 받은 일이 있다. 이런 시상 이력을 감안하면, 능률협회 상을 받은 이후로 한국에서 '상복'이 터졌다고 할 수 있다.

어른의 자세로 기업 경영

1988년 5월 3일 자 <매일경제>에 따르면, 능률협회는 그가 '한 우물만 판 개척자'라는 점과 더불어 '올바른 경영인'이라는 점을 들어 수상자로 결정했다. 이 시상이 있은 1988년 상반기는 전년도 중반에 벌어진 6월항쟁을 계기로 노동자 운동이 활발하던 때였다.

노태우 정권이 민중혁명 가능성을 우려할 정도로 노동자들의 기운이 심상치 않던 이 시기에 '올바른 경영인' 타이틀을 아무에게나 씌워줄 수는 없었다. 노동자들에게도 납득될 만한 인물이었기에 이 미묘한 시기에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볼 수 있다. 능률협회가 수상자를 올바로 골랐다는 점은 7년 뒤의 유일한상 수상자 선정에서도 확인된다.

위의 <세상을 밝힌 인물>은 "그가 한국유리의 노동조합 설립에 찬성한 시점은 1961년이었다"라며 일찍부터 그가 노동조합 결성과 노동자 연대를 지지했음을 알려준다. "경영자의 신념 덕분에 한국유리는 창사 이래 공장이 멈출 정도의 노사 문제를 겪은 적이 없었다"고 이 책은 덧붙인다.

이 회사에서도 당연히 파업이 있었다. 파업이 일어났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떻게 끝났는가'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최태섭은 흠집을 남기지 않았다. 6월항쟁 직후의 민감한 시점에 그가 올바른 경영인으로 부각된 데는 이런 점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최태섭에게는 마음의 빚이 있었다. 학교 친구들과 상하이 망명을 약속했지만 지키지 못했다. 위 전기는 "친구들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로 인한 마음의 빚이 그의 삶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것 중 하나는 민주화운동을 열심히 돕는 장면이다.

위 전기는 그가 다닌 서울 종로구 사직동의 수도교회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수도교회는 1970~1980년대 사이 독재정권의 감시를 받은 적이 있다"라며 운동권 학생들도 이 교회에 숨고 사복경찰들도 이곳을 출입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이 교회 장로인 최태섭이 민주화 기도회에 참석하고 재야운동가 장준하를 돕고 정권의 탄압을 받는 김상근 목사를 지켰다고 알려준다.

독립운동이나 민주화운동 참여 여부가 기업인을 평가하는 일차적 잣대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 땅의 운명과 직결되는 이런 운동에 대한 태도는 최태섭이 한국 사회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기업을 경영한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세상에 대한 애정이 밑바탕에 있었기에, 이윤 추구자의 자세가 아닌 어른의 자세로 기업을 경영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어른들이 기업에서 쏟아져야 우리 사회의 미래는 밝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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