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예능것들이..." 시청자는 모르는 방송가 계급도의 실체
KBS 퇴사 후 넷플릭스 예능 프로그램 제작까지, 맨땅에 헤딩하듯 제안서를 보내고 퇴짜 맞는 일을 반복한 피디의 고군분투 제작기를 전합니다. 16년 차 피디가 소규모 제작사 대표로 OTT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든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고백합니다. <편집자말>
[박인석 기자]
KBS에 재직하던 저연차 조연출 시절, 모 배우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KBS 스튜디오에서 녹화하던 중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그 출연자와 가까운 사이면서 본인 역시 배우였던 유명 인사가 촬영 응원 차 스튜디오에 방문했고 현장의 모든 이목이 그쪽으로 쏠렸다. 자연스럽게 VJ(카메라 감독)의 카메라 시선 역시 그쪽으로 향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그 배우들 모두를 관리하던 소속사 대표는 고성을 지르며 VJ의 카메라를 무력으로 빼앗았다. 녹화가 중단됐다. 업계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과잉 대응이었다. 'KBS 스튜디오'라는 명백하게 촬영이 목적인 우리의 공간에 녹화 진행 중 자발적으로 들어온 연예인의 등장을 카메라에 일단 담아낸 자체가 관행상 무리한 것도, 무례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떤 이유로든 당사자가 방송 출연을 원치 않는다면 카메라에 찍혔을지언정 차후 본방송에 쓰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이 업계의 원칙이기도 했다. 당시 카메라를 뺏긴 VJ가 여자였기에 더욱 지나친 무력사용을 쉽게 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찌됐건 방송일을 15년 넘게 하고 있지만 현장에서 카메라를 관계자가 무력으로 빼앗은 경우는 그 이후로도 듣도보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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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Unsplash Image |
| ⓒ levi_stute_cinematography on Unsplash |
"어디서 예능 것들이..."
콘텐츠 업계에는 알게 모르게 계급이 존재한다. 예능인들과 예능프로그램 제작 관계자들은 오랜 시간 '예능 것'들로 살아왔다. 모두가 예능업계를 이렇게 바라보는 건 아니겠지만, 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분명히 우리를 다소 내려다보는 시선은 곳곳에서 존재해 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어느 정도는 시장의 원리가 정한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것도 알고 있다. 아무래도 대중이 느끼는 연예인으로서의 가치는 통상적으로 배우 업계가 다른 영역에 비해 큰 것이 사실이다.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출연료의 규모도 달라지고, 지상파 3사 연말 시상식에서 어느 정도 비슷한 활약도 있었다면 아무래도 익숙한 예능인보다는 배우들에게 상을 안겨주곤 하는 상황이 되곤 한다. 개그맨 등의 예능인들 역시 프로그램 내에서 배우들과 함께 출연하게 된다면 어딘가 저자세인 모습을 우린 쉽사리 떠올릴 수 있다.
이런 업계의 계급 장벽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낮아지기도 했는데, 이러한 인식의 전환에는 선배인 나영석 피디의 덕이 컸다고 생각한다. 예능 프로그램이 배우들에게 웬만한 드라마나 영화 작품보다 훌륭한 필모그래피가 될 수도 있고, 이를 통해 인지도 제고 효과를 누리는 것은 물론, 많은 광고를 찍으며 큰 수익까지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업계는 학습했다.
예능프로그램의 제작 방식이 시즌제 위주로 바뀐 것도 배우 업계와 예능 프로그램 사이의 거리를 줄이는 중요한 장치가 되기도 했는데 사실 이 역시도 나영석 선배가 만든 문화다. 이즈음을 기점으로 새해가 되면 연기자 회사에서 드라마국이 아닌 예능국에도 들러서 소속 배우 라인업이 담긴 달력도 돌리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든 게 자연스러운 시장의 원리고 훌륭하신 피디 선배들·예능인의 신분으로 업계의 장벽을 넘어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슈퍼스타가 된 몇몇 이들의 활약 덕분에 업계가 조금씩 바뀌고도 있지만, 예능과 예능인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여전히 때때로 서글픈 마음이 들곤 한다. 보통의 경우 '익숙함'이란 감정은 설렘을 약화시키고 권력을 작아지게 한다. 그래서 우리가 연애할 때도 너무 오래 만나다 보면 권태기를 겪고 서로가 서로에게 미치는 권력이 축소 되어감을 느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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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뷔 30주년을 맞이한 김숙. |
| ⓒ 넷플릭스 |
몇 달 전 개그우먼 김혜선씨가 <도라이버> 녹화에 또 한 번 다녀가셨을 때의 일이다. 녹화도 길었고 대기시간도 길어서 죄송했던 마음을 담당 작가를 통해서 김혜선씨에게 전했더니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누군가의 아내 김혜선' 또는 '점핑 강사 김혜선'으로 부름을 받는데 <홍김동전>과 <도라이버>에서는 온전히 '개그우먼 김혜선'으로 살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고. 사실 그렇다. 계급이 어떻든 대접이 어떻든, 예능인들은 그저 예능을 사랑할 뿐이다.
<홍김동전> 시절에는 홍진경씨의 데뷔 3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을 열었고, <도라이버>에서는 얼마 전 김숙씨의 데뷔 3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을 열었다. 그런 생각이었다. 티비에 자주 나오면 너무 많이 나온다고 욕먹고, 너무 출연이 뜸하면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금방 다른 인물로 대체되는 예능이란 전쟁터에서 대중에게 너무 익숙하고 쉬워져도 문제, 너무 소원해서 잊혀도 문제인 딜레마 투성이의 '예능인' 인생을 30년이나 버티며 살아왔다는 건 충분히 박수받고 축하받고, 나아가서 조금 더 '대접' 받아도 되는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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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넷플릭스 <도라이버>에 출연한 개그우먼 김혜선. |
| ⓒ 넷플릭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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