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저 빌헬름 2세가 버리지 못한 것 [한순구의 ‘게임이론으로 보는 경영’]

2025. 8. 9. 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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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비스마르크의 선택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열린 독일 황제 즉위식.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서 독일제국 수립을 선언함으로써 독일 지역의 단결을 유도하는 고단수를 펼쳤다. (위키피디아 제공)
1871년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독일제국 수립의 1등 공신은 초대 황제인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 총리였다.

그런데 독일제국 수립을 선포하는 중요한 의식을 어째서 독일이 아닌 프랑스에서 한 것일까?

당시 독일은 수십 개 작은 영주국으로 나뉘어 있는 상황이었다. 영주국들은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던 상태였다. 자기가 손해를 보면서까지 독일 통일을 할 의지가 없었다. 다만 1806년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가 연이어 전투에서 승리하며 독일 영토를 차지하게 됐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를 계기로 서로 다른 영지에서 생활하던 독일 국민에게 민족의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독일 각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민병대를 중심으로 나폴레옹과 싸워 이김으로써 독일 영토에서 프랑스군을 철수시켰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철수했다고 해서 독일 통일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북쪽 개신교 세력과 남쪽 가톨릭 세력이 반목하고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왕정 체제를 옹호하는 보수주의와 왕을 쫓아내자는 자유주의, 그리고 극단적인 사회주의 혁명 세력이 공존하고 있었다. 여전히 내부적인 단결이 어려웠다.

영리한 비스마르크 총리는 온갖 음모를 꾸며 일부러 프랑스와 전쟁을 일으켰다. 독일 영주국 사이의 내부 갈등을 이기기 위해 외부의 적인 프랑스와 전쟁을 벌인 것. 그리고 보불 전쟁을 계기로 프랑스에 함께 진격한 독일 영주들을 모아 1871년 프랑스에서 독일제국 수립을 선포했다. 독일의 각 영주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독일 내 한 지역에서 독일제국을 선포하면 다른 지역 영주들이 소외감을 느끼고 통일에 반대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으므로 방금 정복한 적국인 프랑스의 궁전에서 독일제국 수립을 선포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주변의 강대국들이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같은 당시 유럽 강대국들은 독일 통일을 바라지 않았다. 유럽 대륙 한가운데에 인구도 많고 근면한 독일이 통일된 국가로 자리 잡는다면 바로 주변 국가에 위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와 전쟁을 해서 이기는 동안 영국과 러시아는 어째서 개입하지 않았던 것일까?

비스마르크는 영국과 러시아를 설득했다. 독일은 통일이 되더라도 영국과 러시아를 넘어서려는 시도는 절대로 하지 않고 영국과 러시아 다음 지위에 만족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비스마르크의 약속을 믿고 영국과 러시아는 독일제국 수립을 묵인했다.

독일은 초대 황제인 빌헬름 1세가 사망하는 1888년까지 이 약속을 지켰다.

특히 비스마르크가 중요시한 것은 러시아와의 동맹 관계였다. 유럽 정중앙에 위치한 독일은 서쪽으로는 영국과 프랑스가 있고 동쪽으로는 러시아가 있는데, 비스마르크는 서쪽과 동쪽의 적군을 맞이하여 동시에 전쟁을 벌이면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보불 전쟁 이후 사이가 나빠진 서쪽의 프랑스와 혹시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동쪽의 러시아와는 전쟁을 피해야 독일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비스마르크의 확고한 외교 노선이었다.

1888년, 빌헬름 1세가 사망하고 황제가 된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3세가 후두암으로 불과 3개월여 만에 사망했다. 그 결과 손자인 빌헬름 2세가 불과 19세 나이로 독일제국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빌헬름 2세는 개국공신인 비스마르크를 총리에서 해임했다.

물론 새로운 황제가 할아버지 때 공신을 해임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행동이다. 문제는 독일제국을 만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많은 일을 비스마르크에게 위임했던 할아버지 빌헬름 1세와 달리 그 손자인 빌헬름 2세는 개인적인 야심이 있었다는 것. 젊은 빌헬름 2세는 독일 국민 인기를 얻어 사랑받는 황제가 됨과 동시에 이런 국민 인기를 바탕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싶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빌헬름 2세 어머니가 영국 공주였는데 외갓집을 방문해 대영제국 해군을 보고는 자신도 대영제국 해군에 뒤지지 않는 독일 해군을 만들겠다는 꿈을 갖게 된 것 등이다. 그래서 황제가 되자마자 독일 해군 건설을 추진했다. 이런 독일 황제의 움직임을 본 영국 정부는 군사적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비스마르크의 약속을 깨고 빌헬름 2세가 해외 식민지 개척에 나선다고 의심했다.

또한 빌헬름 2세는 바로 러시아와의 동맹을 파기했다. 게르만 민족인 독일인이 가장 우수한 민족인데 그보다 못한 슬라브 민족인 러시아에 굽히고 들어가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러시아를 적대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믿고 독일제국 성립을 묵인했던 러시아로서는 배신감을 느꼈을 터. 독일과 러시아와의 관계는 바로 악화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제국이 몰락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시작은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세르비아 수도에서 암살당한 사라예보 사건이라는 것을 독자들은 아실 터. 오스트리아는 게르만 민족이고 세르비아는 슬라브 민족이다. 이 두 국가가 싸우기 시작하자 게르만 민족의 큰 형님이던 독일과 슬라브 민족의 큰 형님인 러시아가 전쟁에 참가해 세계대전이 되었다. 비스마르크 외교 정책을 이어받아 독일이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더라면 제1차 세계대전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경제학 수업에 자주 등장하는 개념으로 ‘사회적 계획자(social planner)’라는 단어가 있다. 경제 정책을 정함에 있어 기업과 노동자와 소비자는 각각 서로 다른 것을 원한다. 이런 개인의 소원을 다 들어주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기업 편만 들면 노동자와 소비자 불만이 쌓여 사회 불안이 발생한다. 반대로 노동자와 소비자 편만 들면 기업 활동이 어려워져 경제가 무너진다. 따라서 정부는 이런 편협하고 이기적인 개인 의견을 참고만 해서 국가에 가장 이득이 되는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국가를 위한 마음으로 정부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을 경제학에서 사회적 계획자라고 부른다. 현실에서는 정치인이나 공무원이 사회적 계획자에 해당한다. 그리고 경제학은 이런 사회적 계획자에게 어떤 경제 정책을 선택해야 국가가 발전할 수 있는지에 관해 최적의 조언을 하는 학문이라고 인식된다.

문제는 사회적 계획자가 정말로 국가를 위한 선택을 할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다. 정치인은 권력을 원하고 공무원을 더 많은 권한을 원하는 개인적인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개인을 국가를 위한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 사회적 계획자가 국가보다 자기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면, 그에게 아무리 좋은 경제 정책을 조언해봐야 헛수고다.

비스마르크 총리와 빌헬름 1세가 대단했던 것은 한 개인으로서 자신을 위한 욕심을 버리고 독일제국에 가장 이로운 정책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와중에 이 두 사람은 국민 비난을 받기도 했고, 비굴하게 해외 강대국 눈치를 보면서 많은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젊은 빌헬름 2세는 장기적으로 독일제국에 불리한 정책이라도 국민의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정책을 선택했고, 전쟁에서 패배할 확률이 늘어나지만 자신이 떳떳해 보이고 구차하지 않으며 마음고생도 하지 않는 외교 노선을 선택했다.

이런 측면에서 경제학도 국가에 좋은 정책을 만드는 데만 노력하지 말고 우선 뛰어난 사회적 계획자가 최고책임자로 선출되도록 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22호 (2025.08.13~08.1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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