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엮여 사형된 서도원 열사
[김삼웅 기자]
|
|
| ▲ 12일 오후 여의도 새누리당사앞에서 열린 '인혁당재건위사건 '사법살인' 부정하는 박근혜 규탄 기자회견'에서 유가족들이 희생자 8명(여정남, 하재완, 이수병, 송상진, 김용원, 우홍선, 서도원, 도예종)의 영정사진을 들고 나왔다. |
| ⓒ 권우성 |
1929년 11월 광주에서 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진주고보에서도 1935년까지 학생항일시위가 계속되었다. 서 열사는 이를 주도하고 시위에 앞장섰다. 그는 졸업을 앞둔 4학년 때 폐결핵으로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인근 절에서 2년간 요양하며 각종 책을 읽으면서 사회의식을 키워나갔다.
23세에 해방을 맞아 <대구합동신문> 기자가 되었다. 이후 이 신문은 <대구민보>, <대구공보>와 통합하여 <대구신보>가 되었다. 얼마 후 그는 <남선경제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신문사는 가톨릭재단으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대구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었다. 그는 꾸준히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작은 돌>이란 칼럼을 썼다.
<대구매일신문>은 경북지역에서 야당지로 알려질 만큼 이승만 폭정을 비판했다. 그는 1951년 재단으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해직기자'가 된 것이다.
해직된 서도원 열사는 그의 능력이 인정되어 1952년 청구대학(현 영남대학)의 초빙을 받아 동양사 강의를 맡았다. 그리고 이 해 배수자와 결혼하여 딸 셋과 아들 둘을 낳았다. 그의 생애에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다.
서 열사는 이승만의 폭정이 계속되면서 이를 비판하였다. 이승만은 1957년 정치적 라이벌인 조봉암을 처형하고 진보당을 해산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 뿌리를 뽑고자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근민당을 비롯 각계의 혁신적인 인사들을 탄압했다.
마침내 4.19혁명이 일어나고 이승만은 쫓겨났다.
억압받아온 혁신계가 활동을 시작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당시 군경과 우익세력으로부터 희생당한 경북지구 '피학살자 유족회'가 결성되고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유족회가 구성되었다. 그는 유족이 아니지만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신념에서 유해발굴과 진상규명에 열정을 다했다. 또한 일제강점기부터 민족민주운동의 맥을 잇고자 조직한 '민연청'에 참여하였다. 1956년부터 진보성향인 <영남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장을 역임하면서 이 분야에 많은 글을 쓰면서 관련 단체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서 열사는 5.16쿠데타 직전에 청구대학에 사직서를 냈다. 그의 교원노조 활동과 몇몇 단체의 활동으로 공안기관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낙인되었다. 학생들과 동료 교수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자 택한 길이다. 박정희가 주도한 5.16군사반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남로당 전력을 덮고자 해서인지 혁신계 인사들을 대거 구속했다.
그도 영장없이 체포되어 5개월 동안 불법구금 상태에서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투옥된 지 2년 7개월 만인 1963년 12월 14일 출옥했다. 박정희가 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선심을 쓴 것이다. 병주고 약주는 행태였다.
독재자들은 정치적 위기에 몰리거나 생뚱한 일을 빌릴 때이면 어김없이 공안사건을 터뜨렸다. 박정희는 그 선수급에 속한다. 1963년 1차 인혁당사건에 그를 엮었다. 박정희는 그동안의 실정과 부정부패, 굴욕적인 한일회담 추진을 비판한 대학가의 거센 저항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인혁당사건'을 날조한 것이다. 1차 인혁당사건은 담당 검사 2명이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고 사직할 정도로 조작한 사건이고, 학생시위도 계엄령 선포로 진압되면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서 열사는 대학으로 복직하고 싶었으나 호적에 붉은 줄이 찍히면서 취업이 쉽지 않았다. 생계를 위해 양계업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였다. 뒤늦게 침술을 배워 생계를 유지했으나 정보기관의 뒷조사와 이웃들의 외면으로 생업도 쉽지 않았다. 그 사이 종신집권을 꿈꾼 박정희가 유신쿠데타를 일으키고 다시 시민·학생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정치적 위기를 맞은 것이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재야, 심지어 침묵하던 야당까지 나서 반유신 운동이 거세게 전개되었다.
서 열사는 1974년 4월 26일 아침 6시경 느닷없이 닥친 형사들에게 끌려갔다. 영장도, 체포되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재판과정에서 인혁당재건위사건에 자신이 주동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차 때는 물론 이번에도 '인혁당'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다. 그런 단체가 실재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1975년 4월 9일 새벽 서도원·김용원·이수병·우홍신·송상진·여정남·하재완·도예종 열사의 순서로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을 집행했다. 대법원이 하루 전에 사형을 확정하자 혹독한 고문으로 날조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재심 청구 등 구명운동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서종철 국방부장관의 사형집행명령서를 받아 4월 9일 새벽 30분 간격으로 8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그의 나이 향년 48세였다.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증언이다.
박정희와 이후락의 지령을 받은 신직수 그리고 신직수의 심복 이용택은 10년 전에 문제됐다가 증거가 없어서 석방한 사람들을 다시 정부전복 음모혐의로 잡아넣었다. 중정이 발표한 혐의사실로 보아서는 이용택이가 새로운 혐의와 이를 뒷받침할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8명은 정부에 비판적이되 국제적인 연관관계를 가지진 않았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박정희는 국제적 말썽이 일어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계산하고 이들을 속죄양으로 본보기 삼아 처형함으로써 국민들이 더 이상 반항을 못하도록 하려는 속셈이었다. (주석 1)
스위스 제네바에 사무실을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박정희 정권은 서 열사의 시신까지 강제로 고향 선산으로 실어갔다. 시신의 고문 상태는 매장 직전 염을 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등어리 부분에 흉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장례를 마친 산소에서 친분이 있는 검사로부터 들었다는 서도원 열사의 유언이다.
1. 내가 무엇 때문에 사형을 당하는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모르겠다.
2. 나는 4.19 후에 혁신운동을 했다. 그로 인해 징역을 살았다.
3. 무엇 때문에 여정남 같은 젊은 학생을 사형시키는가?
4. 통일된 조국을 원한다.
5. 아홉 살 먹은 막내가 보고 싶다. (주석 2)
주석
1> 천주교인권위원회 엮음, 김형욱, <조작된 인민혁명당사건>, 221쪽, 학민사, 2001, <사법살인 1975년 4월의 그날>
2> 이창훈,『다시, 봄은 왔으나』, 92쪽, 삼인, 2025.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동순 엄마는 왜 맨날 우리집에 음식을 갖다주는가
- 자격증 12개 기술자, 성실하고 솜씨 좋아 당했다... 잔혹한 사람장사
- 서울에서 평냉과 수육을 이 가격에? 가성비 그 이상의 맛
- 고교학점제로 '좀비' 돼가는 고등학교
- 5년 내 지구 기온 1.5도 상승... 심각한 위기 최소화 할 방법은 이것
- "다 좋아요" 진심 없는 칭찬이 불러온 결과
- 코끼리 머리에 사람 몸통, 발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
- 잠재성장률 3% 달성을 위한 벤처 생태계 3축 확장 전략
- "퇴진 의사 없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거취 논란 속 밝힌 입장
- 조경태 "윤석열에게 목매는 김문수, 사퇴·정계 은퇴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