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을 먹이로 기증하라고?" 전 세계 뒤흔든 동물원 [임상훈의 글로벌리포트]
[임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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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월 31일(현지시간) 덴마크의 올보르 동물원이 "반려동물을 기부할 수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라며 페이스북에 올린 안내문. |
| ⓒ 올보르동물원 |
어떤 동물은 다르다. 삶에서 의미를 지닌 존재는, 죽음 앞에서 기억으로 남는다. 체온이 빠져나가는 순간을 지켜보고, 그 이별을 글로 남기고, 눈물을 쏟기도 한다. 이렇게 생명과 죽음이 교차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지만, 어떤 동물은 삶이 곧 의미가 되고, 다른 어떤 동물은 죽음으로써 비로소 쓰임을 갖는다.
지난 7월 31일, 덴마크 북부의 올보르 동물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물이 전 세계를 흔들었다. 동물원은 반려동물로 여겨지는 기니피그, 토끼, 닭, 또는 노동 동물인 말 등을 기증받아 맹수의 먹이로 활용하겠다는 안내를 게시한 것이다.
동물원 측은 해당 게시물에서 이를 "자연의 먹이사슬을 모방하고, 죽음을 낭비하지 않는 생태적 방식"이라고 정당화했다. 기증된 동물은 숙련된 직원에 의해 복지 기준에 따라 안락사된 뒤 맹수에게 통째로 제공되며, 이는 영양, 복지, 사냥 본능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조치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온라인 여론은 즉각 양분되었다. 많은 이용자는 "반려동물을 먹이로 기증하라고?"라는 윤리적 충격을 겪었고, 특히 "햄스터를 사랑했던 아이의 슬픔이 생각난다"는 개인 경험을 공유하며 분노했다.
다른 목소리도 나왔다. 기증 대상 대다수가 노령, 유기, 보호소에서 위태롭게 지내는 상태였고, 그 죽음이 자연친화적 방식으로 '순환'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일부 이용자는 "우리는 이미 육류를 소비하면서도 고기 포장 앞에서는 감정을 지운다"며 이중잣대를 지적했다.
어떤 논쟁
이 사건은 덴마크 사회 내에서 '죽음을 보이지 않게 소비하는 문화'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2014년 코펜하겐 동물원에서 어린 기린을 안락사한 후 해부하고 사자에게 먹이로 던진 사건을 예로 들며, 죽음이 '교육적 표현'이 될 수 있다는 북유럽적 관행의 논란도 함께 소환되었다.
동물원의 제안이 인간에게 불쾌감을 준 이유는 죽음 자체에 있지 않다. 문제는 그 죽음이 어떤 감정적 장치를 거치지 않은 채 생경하게 드러났다는 데 있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죽음을 견디기 위해 그것을 감정으로 포장하고, 상징으로 가공해 왔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그 포장을 걷어내며, 우리가 스스로 설정해 온 생명의 위계를 붕괴시켰다.
인류 문명은 육식을 당연한 삶의 일부로 여겨온 전통과, 생명 존중을 이유로 채식을 실천해 온 전통이 함께 공존해 왔다. 두 문화는 다르지만, 대개의 경우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며 긴장 속에서 균형을 이루며 이어져 왔다.
그럼에도 왜 올보르 동물원의 경우는 불편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양분돼 논쟁을 이어가는가.
우리는 모두 어떤 생명은 먹을 수 있고 어떤 생명은 먹을 수 없다고 느낀다. 이 구분은 생물학적 기준이나 법적 분류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정서의 문제이며 문화와 경험, 개인의 기억이 부여한 의미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소는 고기가 되지만, 개는 친구로 남는다. 그것도 일부 문명에서의 이야기다. 다른 문명에서는 반대가 될 수도 있다. 닭은 요리지만, 토끼는 유년의 추억일 수 있다. 이 역시 반대가 성립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어느 동물은 본능의 연장선에서 소비되지만, 다른 동물은 감정의 결로 간직된다. 그리고 이 정서적 구획은 사회마다 다르고, 개인마다 다르다.
올보르 동물원의 제안이 불러온 논쟁은 바로 그 경계를 침범함으로써 비롯됐다. 우리는 고기 진열대 앞에서는 동물의 죽음을 망각하면서도, 반려동물의 죽음 앞에서는 울고 기도한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그 둘을 나누는 감정의 거리, 즉 '애도 가능성'의 기준이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를 노출시켰다.
죽음은 동일하게 일어났지만, 어떤 죽음은 침묵 속에 지워지고 어떤 죽음은 사회적 의미를 획득한다. 이때 우리는 애도할 수 있는 존재와 애도할 수 없는 존재를 나누고 거기서 감정의 위계를 만든다.
올보르 동물원이 했던 일은 이 위계를 가로지른 것이다. 먹는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동물 사이의 정서적 분리를 제거하고 '죽음을 쓸모'로 환원해 버린 행위는 많은 이들에게 혐오에 가까운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냉엄한 사실은, 그 충격이 죽음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위선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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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월 29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동물 보호 및 관리국에서 한 고양이가 입양을 기다리고 있다. |
| ⓒ 로이터 연합뉴스 |
그 상징 작동의 중심에는 '애도 가능성'이라는 정서적 문턱이 있다. 어떤 존재는 죽음 이후에도 이름과 기억을 부여받으며 사회적 애도의 대상이 되지만, 어떤 존재는 죽음 그 자체도 말해지지 않은 채 침묵 속에서 사라진다. 죽음은 같지만,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태도는 다르다. 그래서 죽음은 항상 정치적이다. 누가 애도될 수 있는가를 묻는 순간, 이미 우리는 위계를 설정하고 있다.
올보르 동물원의 사례는 이 장치를 무력화했다. 인간이 심리적으로 구축해 놓은 죽음의 분류 체계를 부숴버렸기 때문이다. 동물은 '죽어가는 존재'가 아니라 '먹는 존재'로 호출되었고, 죽음은 감정의 대상이 아닌 기능의 일부로 환원되었다. 이때 우리는 충격을 받는다. 죽음을 의미 없는 사건으로 맞닥뜨리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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