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담장 낮은 집

2025. 8. 8.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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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내가 살던 집은 담이 낮았다.

할머니가 수첩을 내밀면 나는 그 안의 번호를 눌러 신호음을 확인하고 수화기를 조심스레 할머니 귀에 대주었다.

누군가 숟가락 한 벌만 내오면 그걸로 충분했다.

눈썹 높이쯤이던 그 낮은 담장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높이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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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


어릴 적 내가 살던 집은 담이 낮았다. 황토에 지푸라기를 섞고, 납작한 돌을 포개 쌓은 담장이었다. 까치발만 들어도 마당에 널린 고추며 장독대 위의 고사리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경계를 가른다기보다 그저 구역을 은근히 가늠하는 선에 가까웠다. 담 너머를 바라볼 때면 엄마는 공연히 헛기침해 인기척을 내곤 했다. 그것은 이웃 사이의 조용한 예의였다.

옆집 할머니는 담장 너머로 종종 나를 불렀다. 서울에 사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고 싶지만 글을 몰라 혼자서는 전화번호를 누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수첩을 내밀면 나는 그 안의 번호를 눌러 신호음을 확인하고 수화기를 조심스레 할머니 귀에 대주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괜히 시선을 거두듯, 벽에 걸린 회갑 잔치 사진이나 귀퉁이 누렇게 바랜 표창장을 바라봤다.

할머니는 아들에게 늘 비슷한 말을 했다. “몸 잘 챙기고, 밥 묵어라.” 통화를 마치면 할머니는 언제나 타래과나 약과 같은 주전부리를 손에 꼭 쥐여줬다. 그런 일이 아니어도 엄마와 할머니는 담을 사이에 두고 자주 무언가를 주고받았다. 봄이면 부추전이나 호박전, 동짓달엔 팥죽 한 그릇. 대문을 돌아가는 대신 담 너머로 접시를 조심히 넘겨줬다. 마치 어른들이 소꿉놀이하듯이.

고기 굽는 냄새라도 피어오르면 이웃들은 스스럼없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해도 별로 흉이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누군가 숟가락 한 벌만 내오면 그걸로 충분했다. 우리는 숟가락을 든 채 궁둥이를 조금씩 옮겨 자리를 만들었다. 모기가 달려들면 부채로 종아리를 툭툭 쳐가며, 평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던 여름 저녁.

이제 그런 풍경은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웃음소리, 인기척, 모깃불 같은 것들. 누군가와 ‘담을 쌓는다’라는 말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슬며시 마음을 건네던 그 담. 눈썹 높이쯤이던 그 낮은 담장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높이였으면 좋겠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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