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져 나오는 독백, 그 목소리를 한데 모아 외친다면

한별 2025. 8. 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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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연극 <보도지침>

[한별 기자]

공연 시작 전 핸드폰을 종료해야 하는 보통의 연극과 다르게 잠시 기다려야 한다. 극 <보도지침>에서는 초반 기자회견 장면에서 관객들은 실제 기자들처럼 휴대폰과 카메라를 들고 배우들을 촬영한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암전과 함께 기자회견장은 재판장으로 변한다. 피고인, 변호인, 검사, 판사, 방청객까지 시간과 장소를 넘나드는 인물들은 각자의 신념으로 재판에 임한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기에 그 결과를 이미 알고 있지만,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에 긴장하게 된다.

<보도지침>은 1986년 김주언 당시 <한국일보> 기자가 월간 <말>에 정부의 보도지침을 폭로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2016년 초연 이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여러 프로덕션을 거치며 공연됐고, 대학교 동아리 공연 작품으로도 많이 선택된다. 내가 처음 본 <보도지침>도 학교 동아리 공연이었다. 아마 공연의 주요 배경 중 하나가 대학 '연극 동아리'라는 지점도 이유 중 하나로 보인다. 언론 통제의 역사가 정의롭지 않고 불합리하다는 것을 모두가 동의한다는 점에서 공연이 주는 메시지가 단순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보도지침>의 메시지는 단순하지 않았다. 언론과 연극, 재판장과 공연장을 왔다갔다하며 보여주는 인물의 스토리는 입체적이다. 과거의 불타올랐던 돈결이 지금은 국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검사로 일하며, 국가의 지침에 동의했던 주혁이 보도지침 폭로 사건의 피고로 재판정에 등장한다. 이들을 지도하고 가르쳤던 원달이 판사로 있는 재판정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구성이기에 더욱 연극적으로 보인다.
▲ 연극 <보도지침> 중 기자회견 장면 주혁 역의 임찬민 배우(왼쪽)와 정배 역의 김려은 배우가 기자회견 장면을 연기하고 있다.
ⓒ 한별
성별 구분 없이, 각자의 '정의'대로

<보도지침>에는 일부 배역에 남녀 배우를 모두 캐스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번에는 전 배역에 여성 배우가 함께 캐스팅됐다. 도리어 원달과 목소리 2에는 여성 배우들만이 연기한다. 이 중 여성 배우들로만 합을 맞춰 공연하는 페어를 '여배 페어'라고 부른다. 기존 젠더프리를 시도한 공연에도 여성끼리만 공연하는 페어가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보도지침>에서도 여성들로만 구성해 공연되는 회차가 존재한다.

배우들은 '여성'이 아닌 인물로서 연기했다. 이번 <보도지침> 공연은 대본에서 여자, 남자로 표기되는 배역명도 젠더가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 1, 목소리 2로 바꿨다. 주혁을 연기한 배우 임찬민도 '여배 페어' 배우들의 표정에 집중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각자의 신념과 고민을 통해 연기한다.

판사이자, 연극반 선배이며 교수로서 극의 중심을 잡는 캐릭터 원달을 연기하는 배우 곽지숙은 "분명하게 여성 캐릭터로 생각하고 인물에 집중했다"고 밝혔다. 여성 배우로서 남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아니라 오롯이 여성인 인물로 생각하고 연기했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곽지숙은 그 당시 여성으로 느꼈을 원달을 상상했다고 전했다.

이 공연의 실제 인물들이 남성이었다고 해도 여성이 연기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언론인으로서의 양심, 법률가로서의 해석, 연극반 활동을 통한 갈등과 성찰은 남녀를 구분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보도지침>으로 재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성별이 아니라 시대를 살아가며 생겼던 고민, 각자의 정의를 지키기 위한 노력일 뿐이다.
▲ 연극 <보도지침> 캐스팅보드 연극 <보도지침>의 캐스팅보드. 모든 배역에 여성 배우가 캐스팅돼 있다.
ⓒ 한별
광장 이후, 우리에겐 독백이 남았다

지난해 광장이 열렸다. 계엄이라는 행위로 삶을 통제하려 한 권력자를 향해 사람들은 한목소리를 냈다. <보도지침>은 그런 사람들을 담고 있다. 어째서 국가가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가, 알아야 할 정보와 그렇지 않은 것들을 누가 구분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임찬민은 초연과 재연을 관객으로 관람하면서 "유대와 연대가 명확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연극이라는 광장에서 발언하는 건 배우 뿐만이 아니다. 관객들 역시 배우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탠다. <보도지침>은 공연 무대를 객석이 감싸안은 구조로 공연된다. 법정은 때에 따라 방향이 바뀐다. D구역에 앉아 있던 나는 처음에는 검사를 마주 봤다가 끝내는 변호사를 마주한 채로 재판을 마쳤다. 이 공연에서 관객은 방청객이자 대학 연극반의 일원이 되고, 그때의 대학 캠퍼스에 존재했던 목격자가 된다.

임찬민은 공연하며 "말이 하나의 방향으로 모이는 것에 중점을 뒀다"고 말했다. 개개인의 역량보다는 배우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앙상블에 초점을 맞췄다는 뜻이다. 배우들이 어우러질 때 관객들의 목소리도 그 안에 끼어들게 된다. 배우와 앙상블이 함께 목소리를 맞추는 것은 지난해 광장에서 여성과 농민, 성소수자와 청소년이 모두 모였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아무리 감추려해도 터져 나오는 말은 참을 수 없다. 광장에서, 사회에서 우리는 서로를 들어야 하고 말해야 한다. 알게 모르게 각자의 독백을 지닌 사람들이 광장에 모이면 그 말에 힘이 생긴다. <보도지침>에서 말하는 기자의 역할은 그렇게 터져나오는 말들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말을 글 혹은 콘텐츠로서 대변하는 사람이다. 그런 기자들이 가져야 할 신념과 윤리는 무엇인지 깊은 생각에 잠긴다.
▲ 연극 <보도지침> 로비 연극 <보도지침> 로비에 전시돼 있는 보드판. 출연 배우들의 한 마디가 적혀 있다.
ⓒ 한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https://blog.naver.com/burn_like_a_star에도 실립니다. 필자 블로그와 인스타그램(@a.star_see)에 취재 후기와 함께 공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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