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사건 엮여 사형된 여정남 열사
[김삼웅 기자]
△ 1960년 2. 28때 고등학생 시위 참여
△ 1964년 6월 3일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투쟁으로 3번 제적
△ 1971년 필화사건으로 구속
△ 1972년 11월 유신반대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
△ 1974년 4월 인혁당재건위사건으로 구속
△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 1975년 4월 9일 사형 집행
여정남 열사의 민족·민주운동의 약전이다. 그는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태연하게 유행가 한 가락을 뽑았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으로 끌려가며 불렀다는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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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정남 공원 앞 열사의 흉상 앞에 놓인 국화꽃들. 여정남 열사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4월 9일 후배들을 이날을 기리기 위해 특별한 무대를 가졌고, 선. 후배 동문들이 모여 연극, 합창, 여정남 학교등을 통해 그를 기억하고 그의 정신을 이어갔다. |
| ⓒ 김용한 |
언덕 위에 초가산간 그립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사람아
달 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세 동무
천리 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작년 봄에 모여 앉아 찍은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후략)
여정남 열사는 1944년 5월 7일 대구시 중구 전동(현 남일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처승이었다. 경북중학교와 경북고등학교를 거쳐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정의감과 사회의식이 남달랐던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이승만 정권이 야당후보 유세를 듣지 못하도록 일요일 등교조치를 취하자 이에 저항하는 2.28시위에 참여했다.
4.19혁명이 일어나고 전국적으로 교원노조가 결성되자 이에 대한 지지운동에 나서고, 민족통일연맹(민통련) 경북고등학교 공동위원장으로 활약했다. 이어 2대악법 반대투쟁, 남북학생회담 성사투쟁에 참가했다. 이같이 활동하던 중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그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드물게, 군사정권에 의해 투옥되어 1년 옥살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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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배들이 헌화하는 광경 여정남 공원에 마련된 그의 형상 앞에 헌화하고 있는 후배들의 모습 |
| ⓒ 김용한 |
나아가 총학생회와 정사회는 전국 대학생들과 현실 인식을 공유하고 연대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 전국 대학생 학술토론회를 개최했다. 토론대회를 군 제대 후 막후에서 정사회를 지도하던 여정남이 6.8부정선거 규탄투쟁 이후 전국 대학생들의 연합투쟁 필요성을 느끼면서 제안한 것이었다.
1968년 11월 25일경 경북대 총학생회 주최로 열린 제1회 전국 대학생 학술토론회는 '후진국의 현실과 방향 모색'이라는 주제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를 비롯한 9개 대학 20개 팀이 참여하여 열띤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주석 1)
여정남 열사의 치열하고 옹골찬 민족민주운동은 오래 전부터 중앙정보부의 촉수에 걸려 있었다. 중정은 창설 이래 박정희 정권의 사설기관으로, 반박 활동가들을 추적하고 정권이 위기에 몰릴 때이면 공안사건을 조작하는 등 국면을 호도해왔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그를 끼워 넣고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중정이 이 사건을 조작하면서 끼어넣은 제1차 인혁당 사건과 무관한 유일한 경우이다. 담당 연호인 한승헌의 증언이다.
나는 ('인혁당 사건'의 피고인이 아닌) 여정남 군의 항소심 변호를 맡게 되었다. 그의 1심 변호인이던 강신옥 변호사가 군법회의 변론 도중 구속되는 바람에 내가 '인계'를 받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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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정남 '상고이유서' 첫 장 |
| ⓒ 정운현 |
여정남 열사 등 8명은 비상고등군법회의 (1, 2심)를 거쳐 일제강점기 총독부 판사를 지낸 민복기 대법원장의 주재로 열린 상고심에서 상고를 기각 사형을 확정했다. 그동안 가족 면회나 변호사 접견도 거부당하고 혹독한 고문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는 호소에도 법원은 철저히 이를 외면한 채 법비 노릇에 충실했다.
여정남은 처음에는 민청학련 관계자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인혁당재건위 학원 담당책이라는 이유를 덮어씌워 인혁당 관련자 7명과 함께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판결을 받은 다음 날인 1975년 4월 9일 새벽 사형을 집행당했다. 유신 당국은 송상진·여정남의 시신을 싣고 있던 운구차를 크레인을 동원하여 강제로 탈취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고는 벽제화장장에서 화장한 뒤에 유골만 가족에게 인계했다. 이는 정부 당국이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이 받은 엄청난 고문 흔적을 감추려고 벌인 반인륜적 소행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주석 3)
법원은 유족의 재심 청구에 따라 2007년 1월 23일 무죄를 선고했다. 여정남 열사의 유해는 대구 칠곡 현대공원에 안장돼 있다.
주석
1> 편찬위원회 편,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사 1945~1979 청춘, 시대를 깨우다>, 2017.
2> 한승헌, <자서전>, 169쪽.
3> 앞의 책,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사 1945~1979 청춘, 시대를 깨우다>, 2017.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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