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사건 엮여 처형된 이수병 열사

김삼웅 2025. 8. 4.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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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열전 8] "내가 죽는 이유는 오로지 민족민주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김삼웅 기자]

짓눌린 지초(地草)처럼
치솟는 해일(海溢)처럼
그렇게 강인하고
그렇게 감격스런
새해를 또 맞으시기 바랍니다.
- 1974년 새해 아침, 이수병

이수병 열사가 사법살인 당하기 1년 전인 1974년 새해를 맞아 친지들에게 보낸 연하장이다. 지초처럼 해일처럼 그토록 힘차고 당당했던 청년은 얼마 후 박정희 유신권력에 의해 생명을 빼앗겼다.
 12일 오후 여의도 새누리당사앞에서 열린 '인혁당재건위사건 '사법살인' 부정하는 박근혜 규탄 기자회견'에서 고 이수병씨의 부인 이정숙씨가 남편의 영정사진을 들고 참석하고 있다.
ⓒ 권우성
이수병 열사는 1937년 1월 15일 경남 의령군 부림면에서 태어났다. 신반중학교를 거쳐 1953년 부산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사회과학 학습모임 '일군회'를 조직하고(그 뒤 암장으로 개칭) 1956년 부산대학교 교육학과에 진학한데 이어 1959년 신흥대학(현 경희대학) 정경대학 경제학과 2학년에 편입했다. 신흥대학으로 전학한 것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4.19혁명 후 경희대학교 학생민족통일연맹위원장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4월혁명 공간에서 이승만 정권에 의해 봉쇄되고 탄압받았던 통일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61년 2월 조용수가 <민족일보>를 창간하여 기존의 보수 신문과는 크게 돋보이는 편집을 하여 학생·지식인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는 이 신문에 '상아의 광장'을 기고했다.

학생은 상아탑 속에서 관념만을 파먹고 살 것이 아니라 상아의 광장에서 냉혹한 현실에 직접 접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리진대 현하 굴욕적인 한미경제협정을 반대하는 우리 학생들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은 바로 민족의 매판세력이든가 특권층일 것이다.

그들은 민족의 발전을 위해 반성 있기를 촉구한다.(…)우리는 미국 인민이나 미국에 대하여는 아무런 감정이나 의혹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예속성을 강화시키려는 양국의 특권세력과 협정을 반대하는 것이다. 우리 장 내각은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우리들 학생의 반대 투쟁 대열에 함께 나서기를 바란다. (주석 1)

그는 진보적 청년 조직인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회)에 참여했다. 그리고 1960년 11월 경희대 동급생들과 '경희대민족통일연구회'를 결성, 회장을 맡았다.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이로 인해 구속되어 군사재판에서 15년형을 선고받고 7년 복역했다. 박정희 군부독재는 혁신계와 진보적인 민족운동 단체를 좌경용공으로 몰아 혹독하게 탄압했다.
1964년 4월에 출소한 이수병 열사는 1년여 고향에서 긴 옥고로 망가진 몸을 추스르다가 상경하여 녹번동 시장에 지물포를 열었다. 고향의 특산품점이었다. 이 무렵 이정숙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1녀를 둔 가장이 되었다.
 12일 오후 여의도 새누리당사앞에서 열린 '인혁당재건위사건 '사법살인' 부정하는 박근혜 규탄 기자회견'에서 유가족들이 희생자 8명(여정남, 하재완, 이수병, 송상진, 김용원, 우홍선, 서도원, 도예종)의 영정사진을 들고 나왔다.
ⓒ 권우성
박정희 정권은 평화통일 논의를 봉쇄하고 혁신계의 정치활동을 차단하는 등 극우적인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수병 열사는 1971년 1월 서도원·이영석·김세원·우홍선 등과 경락연구회를 조직하고 통일문제 등을 토론했다. 이 시기 생활비를 벌고자 일어학원 강사를 하였다. 하지만 이같은 일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박정희는 1972년 유신쿠데타를 일으켜 한국사회를 다시 계엄령과 긴급조치라는 반민주·반헌정 질서가 강화하고 많은 학생·민주인사들이 체포하였다. 국민적 저항에 몰린 유신권력은 인혁당재건위라는 사건을 날조하고 그와 동지들을 엮었다.

1974년 4월 18일 영문도 모르는 채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체포되어 끌려갔다. 모진 고문이 자행되었다. 검찰에 넘겨져 방대한 조서가 꾸며졌다. 그들이 작성한 조서가 가혹한 고문으로 만들어져 자신도 생판 모르는 사건이었다. 북한의 지령을 받고 반국가지하단체를 조직했다는 상투적인 '고정답안'이 그대로 적용되어 1심에서 최종심까지 사형이 선고되었다. 1심과 2심은 비상보통군법회의와 비상고등군법회였다. 결과는 대법원도 다르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부에서 판사를 지낸 민복기 대법원장의 주재로 2심 판결이 확정되었다. 다른 대법관들 역시 친일 판사들이었다.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한 다음날(4월9일) 새벽 4시 55분부터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수병 열사는 세 번째 순위였다. 당국은 가짜 유언을 만들어 언론에 배포했다. 종교의식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사형집행 당시 군종목사로서 현장을 지켜봤던 박정일 목사는 뒷날 이수병 열사 유언은 "내가 죽는 이유는 오로지 민족민주운동을 했기 때문이다"였다고 증언했다.

노무현 정부시절에 사법부는 (2007년 1월 23일) 이들 8인의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하였다. 고인의 유해는 고향에 묻혔다가 2018년 이천에 있는 민주화운동 기념공원으로 이장하였다. '이수병선생 기념사업회'는 2025년 4월 그의 모교인 경희대학 정경대학 303호실을 '이수병 강의실'로 지정하고, 50주기 추모식과 '이수병장학금' 수여식을 가졌다.

주석
1> <민족일보>, 1961년 2월 24일자.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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