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형한 눈빛'에 넋나간 청주시민들... 독립투사의 해방 행진
잊혀진 충북 청주 현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청주 기억여행을 떠납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 4.19 혁명 시기까지 청주에서 있었던 정치, 사회 사건을 살펴보고 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근현대사 역사 텍스트를 만드는 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인권, 평화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 <기자말>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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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북 청주시 탑동에 있었던 청주형무소 전경 |
| ⓒ 청주교도소 |
뙤약볕보다 뜨거운 눈빛
잠시 후면 청주형무소 안의 예방구금소에 투옥된 독립운동가들이 석방되기 때문이다. 형무소장과 담판을 지으러 들어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여운형의 친형 여운일과 정안립이 옥문을 나선 때는, 그들이 들어간 지 한 시간 만이었다.
약 30분이나 지났을까? 까까머리에 텁수룩한 수염을 한 이들이 하나둘 옥문을 나섰다. 누군가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구동성으로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애국자 만세!" 소리도 연이어 울려 퍼졌다.
그렇게 하나둘 옥문을 나선 이들이 청주형무소 정문 앞에 섰다.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오고, 피골이 상접한 이들이었지만, 그들의 눈빛은 한결같이 빛났다. 약식 환영대회가 치러졌다. 서울에서 내려온 여운일이 먼저 인사말을 했다. 이어서 충북치안유지회 정안립 회장과 청주제일교회 구연직 목사가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청주형무소 정문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청주제일교회 청년들과 청주시민들은 이들의 환영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금방 옥문을 나선 독립투사들의 형형한 눈빛에 넋이 나갔을 뿐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의 간단한 답사에 이어 이날의 하이라이트인 독립운동가 환영대회 장소로 행진이 시작됐다.
탑동의 청주형무소에서 환영대회 장소인 중앙공원까지는 800여 미터에 불과했다. 하지만 옥문을 나선 독립운동가들의 건강은 말이 아니었다. 일제 경찰의 고문으로 온몸이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시민들은 독립운동가들을 부축하며 걸음을 맞췄다.
형무소에서 큰길을 나서자, 소문을 접한 시민들이 도로변에서 만세를 외쳤다. 걷는 이들이나 인근에서 만세를 외치는 시민들이나 한결같이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식들이 군인과 노동자로 일본에 끌려갔다가 소식이 끊긴 여성들은 아예 대성통곡을 했다. 석방된 독립투사들을 보며 자식 생각이 더욱 간절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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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년 청소년들의 독립운동가 환영대회 재연. |
| ⓒ 충북역사문화연대 |
석교동에 있던 남부양곡가공조합 서기 최동찬(1927년생)은 청주제일교회 형들로부터 독립운동가 환영대회를 한다는 기별을 받고, 일찌감치 중앙공원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최동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당유치원 졸업식에도, 영정보통학교 운동회 때에도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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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가도 |
| ⓒ 박만순 |
이날 청주형무소 옥문을 나선 73명의 독립투사는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조선독립'이라는 과제에 헌납한 이들이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일제강점기 말, 일제의 독립운동가 강제전향 공작에 당당히 맞선 이들이기도 했다.
이들은 일제가 조직한 사상전향 단체 대화숙(大和塾)에 가입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1941년에 만들어진 예방구금령에 의거해 청주형무소 내 '예방구금소'에 구속됐다. 예방구금령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위반한 반민주주의적인 악법이다. 즉, 일제는 재판을 통해 만기 수형생활을 한 비전향 독립운동가들을 석방하지 않고 수년간 예방구금소에 억류했다.
1943년 10월 1일부터 청주예방구금소에 구금된 이들 중 절대다수는 사회주의자였다. 민족주의자들은 1930년대 들어 대부분 자치론자, 동화론자로 사상을 전향했다. 그나마 민족주의 좌파 일부만이 준비론, 교육 등을 명분으로 소극적 저항을 했을 뿐이다.
고무신과 옷, 여비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겨워하는 독립운동가를 대표해 김일권이 답사를 했다. "신생조국은 친일파 청산이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참석자들이 "옳소!"라며 맞장구를 쳤다.
김일권의 연설이 계속됐다. "농사짓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줘야 합니다." 토지개혁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에 농민들뿐만 아니라 청주시민들의 열광적인 지지가 이어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만인이 평등한 사회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후 고무신을 잔뜩 안은 이가 연단에 올랐다. 고무신을 안은 이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사회자의 입이 귀에 걸렸다. "고무신가게 이만수 사장님이 독립투사들께 고무신을 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 예상치못한 선물에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시민들도 자신들의 일인 양 좋아했다.
선물 전달식이 이어졌다. 남주동시장에서 지물포(紙物鋪) 장사를 하는 김종록이 종이 2연(전지 크기의 종이 1000장)을 기증했다. 종이가 귀했던 시절이라 무엇보다 소중한 선물이었다. 피복공장을 하는 허광은 작업복 수십 벌을 가져왔다. 그렇게 남주동 시장 상인들은 자신들이 파는 물건들을 아낌없이 제공했다.
도청 앞에 있던 성산병원 원장은 "몸이 불편한 분들을 위해 무료로 진료하고 약까지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청주제일교회에서는 독립투사들의 귀환 여비를 개인당 5원씩 제공했다.
독립운동가 환영대회가 열린 중앙공원은 순식간에 '대동세상'이 된 듯했다. 선물을 주는 이나, 받는 이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시민들 모두 입이 귀에 걸렸다.
환영대회를 마친 독립운동가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삼삼오오 헤어졌다. 서울과 경기권의 사람들은 청주역에서 충북선을 타고 조치원역으로 갔다. 그곳에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들을 서울까지 환송하기 위해 동아인쇄소 사장 김동환(일제 때 동아일보 청주지국장)과 방앗간 주인 김아무개가 서울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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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주예방구금소에 구속돼 해방을 맞이한 윤가현 |
| ⓒ 임경석 |
"여보." 1938년에 시집 온 아내 정일남(1919년생)은 남편을 보자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녀가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윤가현은 세 번째 옥살이를 해야 했다. 1939년 2월부터 12월까지 강진경찰서 유치장에 장기간 구금된 것이다. 뚜렷한 범죄 물증도 없고, 법원 판결도 거치지 않았다. 윤가현은 '수상해 보인다'는 고등경찰의 판단만으로 10개월씩이나 갇혀 지내야 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하고,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삼엄한 시기였다. 그 시기, 사상범 출옥자에 대한 감시와 탄압은 극단적으로 악화되고 있었다. 강진경찰서에서 석방된 윤가현은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갔다. 그러나 서울에서 그는 다시 네 번째 투옥을 당하고 말았다.
윤가현은 비전향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범죄 혐의도 없이 재판도 거치지 않은 채 사상범예방구금령에 의해 수감된 희생자가 됐다. 그는 그렇게 1941년 3월에 시행된 이 '폭압 정책'의 희생자가 됐다. 1941년 6월부터 1945년 8월까지, 경성형무소와 청주예방구금소에 4년 2개월 동안 갇혀 지냈다. 역대 수감생활에서 가장 길고 혹독했던 이 감옥살이는 8·15 해방이 돼서야 겨우 끝났다.
정일남은 결혼 후 남편과 같이 생활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더군다나 첫아이 임신과 출산을 남편 없이 해결했다. 그러니 남편이 자전거를 타고 집에 온 것이 꿈만 같았다.
윤가현이 청주예방구금소에서 해방을 맞이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광주학생사건에 호응해 자신의 모교인 수동보통학교 동맹휴업을 지도한 일로 1930년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
1년간 옥살이를 한 그를 맞이한 건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이었다.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 후, 조선은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대륙병참기지로 전환됐다. 농민을 비롯한 조선 민중들의 생활상은 최악이었으며,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도 고강도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남지역 운동가들은 전남운동협의회를 만들었다. 이 협의회는 1920년대 지식인 중심의 조선공산당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1930년대 전남지역 최대의 조직사건인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은 1934년에 터졌다. 전남운동협의회의 강진군 조직책이었던 윤가현도 이 사건으로 1934년 2월부터 1937년 1월까지 다시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는 해방 후에도 혁명운동에 종사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때 충청남도 인민위원장을 맡았고, 빨치산이 돼 대둔산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일제에 굴하지 않은 독립투사의 최후는 너무나 허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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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주형무소에서 1944년 10월 26일 옥사한 이재유가 검거된 기사 |
| ⓒ 경성일보 |
1905년 함경남도 삼수에서 태어난 이재유는 1925년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시작한 그는 1928년 8월, 제4차 조선공산당 관련자로 체포돼 경성부(서울)로 압송됐다. 석방 후에도 끊임없이 활동하다 경찰에 체포됐으나 2차례나 탈옥을 했다. 특히 경성대학교 미야케 교수의 집에 은거했던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는 1938년 7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2년 9월 12일 형기가 다 채워졌음에도 이재유는 비전향자라는 이유로 출옥하지 못했고, 전향을 끝까지 거부하여 너무나도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이렇게 되어 비전향 장기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청주보호교도소로 옮겨져 지내게 되고, 혹독한 생활을 겪으면서 끝내 해방 10개월 전인 1944년 10월 26일 옥사했다. 허무한 죽음이 아니었다면 이재유는 조선 건국의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처럼 청주형무소 예방구금소는 치열한 민족해방운동의 역사가 농축된 곳이었다.
[참고 문헌]
홍원길, <청곡회고록>, 1978
청주근세60년사화편찬위원회, <청주근세60년사화>, 1985
이승우, <도정반세기>, 1996
국사편찬위원회, '1940~50년대 청주지역 정치사회상', 2009
이충호, '해방 직후 청주지역 우익세력의 형성과 활동', 2013
박영자, <해남의 근현대사>, 2005
김경일, <이재유>, 2006
충북역사문화연대, <지도 들고 청주시현대사 여행>, 2008
충북역사문화연대, '청주시현대사지도', 2008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겨레21> 2022.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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