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날조' 사법살인 8인의 사력
[김삼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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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차 인혁당 사건 재판 사진. |
| ⓒ 4.9통일평화재단 |
"내가 검토한 바로는 유신과 유일은 일본산 황국신민사상과 유전자 구조가 99%가 일치한다. 딱 부러지게 말해서 유신과 유일은 일본제 황국신민사상의 일란성 쌍둥이다." (주석 1)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종신집권 체제를 만들었으나 국민은 쉽게 이를 승복하지 않았다. 재야에서 시작한 개헌청원운동본부가 1974년 1월 초에 이미 서명자가 30만 명을 넘고, 각계에서 지지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에 박정희는 1월 8일 긴급조치 1호, 2호를 선포하여 국민의 주권활동을 봉쇄하고, 비상보통군법회의를 열어 장준하·백기완 등을 구속했다. 평상시에 민간인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여 중벌을 내린 것이다. 집권 13년 차에 이른 박정희에게 74년은 정치적 위기의 해였다.
계엄령, 위수령에 이어 긴급조치까지 연달아 발동하여 무시무시한 형벌과 공포감을 불러일으켰으나 날이 갈수록 약효가 떨어졌다. 그래서 다시 꺼낸 것이 '용공카드'로 국민을 겁박하는 길이었다. 74년 4월 25일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어마어마한 공안사건을 발표하여 국민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날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대통령 긴급조치 제4호가 선포된 지 3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신직수 부장의 발표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재건위조직과 재일조총련계 및 일본공산당, 국내좌파 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 74년 4월 3일을 기해 현정부를 전복하려 한 불순 반정부세력으로, 이들은 북괴의 통일전선형성 공작과 동일한 4단계 혁명을 통해 노동자·농민에 의한 정권수립을 목표로 했으며, 과도적 정치기구로 민족지도부의 결성을 획책했다.
이들이 획책한 이른바 4단계 혁명은,
① 유신체제를 비민주 독재로 단정, 반정부세력을 규합하며 ② 4월 3일을 기해 전국 주요대학이 일제히 봉기하여 중앙청·청와대 등을 점거 파괴하고 ③ 민주연합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내용으로 했다.
민청학련의 배후 주동인물로는,
① 전 인혁당수 도예종과 여정남 등의 불순세력 ② 재일조총련 비밀조직의 곽동의와 곽의 조종을 받은 일본공산당원 다치카와 하야카와 등 일본인 2명 ③ 기독교학생총연맹 간부진 ④ 이철·유인태 등 주모급 학생운동자와 유근일 등이다.
73년 말 절정에 달했던 학원가의 반독재 시위는 긴급조치 1호의 선포로 잠시 수그러들었다가 이듬해 신학기의 시작과 더불어 대학가는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연초부터 떠돌기 시작한 '3, 4월 위기설'이 나도는 가운데 4월 3일 서울대·성균관대·이화여대 등에서 일제히 데모가 일어났다. 서울대 의대생 5백여 명은 흰 가운을 입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날 데모의 특징은 거의 같은 시간에 각 대학이 동시에 시위를 벌였다는 것과 선언문의 주체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의 명의로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학생들이 시위에서 배포한 〈민중·민족·민주선언〉의 유인물이 민청학련 사건의 단초가 되었다.
이 유인물은 ① 부패·특권·족벌의 치부를 위한 경제정책을 시정하고 부정부패·특권의 원흉을 처단할 것 ② 서민들의 세금을 대폭 감면하고 근로대중의 최저생활을 보장할 것 ③ 노동악법을 철폐하고 노동운동의 자유를 보장할 것 ④ 유신체제를 철폐하고 구속된 애국인사를 석방할 것 ⑤ 모든 정보·폭압정치의 원천인 중앙정보부를 해체할 것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정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4월 3일 저녁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정부는 민청학련사건을 기화로 학생들의 반유신투쟁에 족쇄를 채우고자 이 사건의 관련자들을 급조한 비상군법회의에 송치했다. 군법회의에 송치된 사람은 배후조종 혐의로 전 대통령 윤보선,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김동길·김찬국 교수, 김지하 시인을 비롯, 인혁당 재건관련자 21명, 일본인 2명을 포함한 무려 253명에 이르렀다.
7월 21일 열린 비상군법회의 첫 공판에서 이철·유인태·여정남·김병곤·나병식·김지하·이현배 등 9명에게 사형, 유근일 등 7명에게 무기징역 등 가혹한 형벌이 선고되었다. 이에 앞서 7월 8일 열린 인혁당계에 대한 결심공판에서는 서도원·도예종·하재완·송상진·이수병·우홍선·김용원 등 7명에게 사형을, 김한덕 등 8명에게 무기징역, 나머지 6명에게 징역 20년이 각각 구형되었다.
민청학련사건 관련자에 대한 군법회의 재판은 74년 6월 15일부터 10월 11일까지 119일간 계속되었다. 74년 한여름 내내 긴급조치 피의자들을 다루는 군법회의 공판정은 연일 사형, 무기징역, 20년, 15년 등 유례없는 중형을 선고하여 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다. 히틀러의 나치시대를 방불케하는 한국판 공포시대였다.
이로 인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 및 시위가 학계 및 종교계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번져가고 각계 각층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이 전개되는 한편, 외교문제로까지 번져 미국 의회에서 대한 군사 경제원조의 대폭삭감이 논의되는 등 국제여론이 악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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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 구속자 가족들이 구속자 석방 거리 행진을 방해하는 경찰에 항의하는 장면 |
| ⓒ 4.9통일평화재단 |
이들은 비상군법회의 검찰부에 의해 국가보안법·반공법·내란예비음모·내란선동 등 혐의로 구속·기소되어 비상보통군법회의, 비상고등군법회의, 대법원 확정판결에 이르기까지 3심을 거치는 동안 형량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특히 도예종·서도원·하재완·이수병·김용원·우홍선·송상진·여정남 등 8명의 피고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형이었다. 이들을 희생양으로 지목한 것이다.
인혁당사건을 둘러싸고 이번에도 고문에 의한 조작설이 드러났다. 피고인들의 법정진술과 가족들에 의해 고문사실이 알려졌다. 고문과 조작설을 대담하게 터뜨리면서 항의하고 나선 사람은 외국인 조지 오글 목사와 제이스 시노트 신부였다. 이들은 인혁당사건이 수사기관의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밝혔다가 얼마 후 한국에서 추방당했다.
인혁당사건의 고문과 조작설에 대해 박대통령과 황산덕 법무장관이 이를 부인하는 가운데 4월 8일 대법원은 8명의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확정했다. 이례적으로 대법원 판결 바로 다음 날인 4월 9일 이들 8명에 대한 사형집행이 강행되었다. 확정판결 다음날 사형을 집행하는 일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시신도 유족들에게 인도하지 않았다. 정부 당국은 고문흔적을 없애기 위해 불법적으로 화장을 하는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위원회는 인혁당사건이 조작된 것을 밝혀내고, 사법부는 뒤늦게 재심하여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국가는 유족에게 배상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에서 유족에게 지불했던 배상금 일부를 환수하는 등 반인륜적인 작태가 계속되었다.
주석
1> 최상철, <알몸 박정희>, 254쪽, 사람나라, 2001.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민주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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