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주택가 한복판에 돌로 쌓은 피라미드형 고분이?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몽촌(夢村)을 둘러싼 토성이다. 꿈(꾸는) 마을이란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본시 곰 마을이던 어의가 변했다던가. 그게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만은, 500년 도읍의 실체가 아직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다니 여전히 꿈꾸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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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촌과 한강(1930년대) 한강이 부리도 위 아래로 갈라져 흐른다. 송파와 풍납리 사이 구불구불한 성내천이 흐르고, 그 끝에 해발 45m의 구릉이 꽃망을처럼 맺혔다. 위로 풍납리가 보인다. 동쪽은 산과 평야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지도 보이지 않는 부분에, 광진교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1936년 이전으로 추정한다. |
| ⓒ 국토정보플랫폼(부분) |
잠실과 신천은 부리도였고, 강물이 부리도를 감싸며 위아래로 갈라져 흘렀다. 강의 흐름이 2천 년 전에도 지금과 같았는지는 알 수 없다. 부리도 남쪽이 삼전도와 송파나루다. 송파나루 동북쪽, 강물이 갈라지는 가장자리에 백제가 성 둘을 쌓았다. 각기 남성(南城)과 북성(北城)이다. 이중 남성이 몽촌토성이다. 모름지기 강엔 항구를 두지 않았을까? 한성백제의 도성인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의 실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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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촌토성 모형 몽촌토성 옆 '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한강과 주변, 그리고 두 토성의 모형 중 몽촌토성 부분이다. |
| ⓒ 이영천(현장촬영) |
상상해 본다. 강 남쪽 풍납토성에 도읍을 정한 온조가 형의 백성을 받아들이며, 몽촌토성을 대피용으로 쌓지 않았을까. 다양한 목적으로 도성 곳곳에 궁궐 여럿을 지은 조선처럼 말이다.
자연 지형을 활용한 천혜의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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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자 동북쪽에서 자연으로 흘러 한강으로 드는 성내천을, 서북쪽으로 끌어들여 인공 해자를 두었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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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성과 목책 해자가 없는 동남측, 판축공법으로 쌓은 성벽에 2중의 방어 장치로 설치한 목책. 발굴 과정에서 두꺼운 나무 등을 박았던 구덩이가 드러났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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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쪽 성벽 구릉의 가장 높은 곳인 서쪽 성벽. 지형을 더 급하게 깎아 다듬고 밖으로 성내천을 끌어 들여 깊은 해자를 두었다. |
| ⓒ 이영천 |
한성백제 최후의 날
한성백제의 최후가 기록으로 남았다. <삼국사기 개로왕 편>에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살해되다'의 내용이다.
475년 가을 9월에 고구려왕 거련(巨璉)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와서 왕도인 한성을 포위하였다.…(중략)…고구려가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중략)…이때 이르러 고구려의 대로(對盧) 제우(齊于)·재증걸루(再曾桀婁)·고이만년(古尒萬年) 등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북성을 공격하여 7일 만에 빼앗고 옮겨서 남성을 공격하니 성안에서는 위태롭고 두려워하였다. 왕이 (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망하자 고구려 장수인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 왕의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나열한 다음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었다.
왕의 최후가 비참하다. 그가 끌려가 죽었다는 아차성을 두고 설이 분분하다. 한강 건너 아차산성이 아닌 고구려의 어느 성곽이나 보루 중 하나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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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문지 토성 북쪽의 낮은 곳에 위치한 북문지. 이곳을 통해 북성인 풍납토성으로 통했을 것이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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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촌토성(1972년_항공사진) 구릉으로 남아 있는 경사지의 숲이 드문드문 보이고, 마을과 농경지가 일상인 듯 평온해 보인다. 주민들은 1980년대 중반 인근 둔촌동 등으로 이주한다. |
| ⓒ 이영천(현지안내판) |
강물이 마른 9월, 3만 대군이 한강을 건너 하남위례성을 공격한다. 7일간 치열한 공방전은 결국 화공이 치명타였다. 북성보다 방어가 강한 남성에서 싸우던 개로왕이 위급에 처해, 후사를 도모할 아들 문주왕을 웅진으로 보낸다.
뭉개진 고도의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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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촌동 고분(2020) 백제 고분으로, 남한에 유일한 돌로 쌓은 피라미드형 고분군. 사진의 맨 위 고분이 3호분으로 규모가 가장 크다. |
| ⓒ 국가유산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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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이동 고분군(1985) 석촌동 고분과는 다르게, 흙으로 둥글게 쌓은 고분군. 8기가 남아있다. |
| ⓒ 서울역사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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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촌토성 88년 서울올림픽을 치르면서 발굴을 거쳐 공원화가 진행되었다. |
| ⓒ 국가유산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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