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게 처참하게 당한 지도자... 그가 꺼낸 '비장의 카드' 실체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5. 8. 2.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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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교체의 명장면들] 전쟁 책임을 떠안고 실각한 유성룡

[김종성 기자]

선조 임금은 임진왜란 초반에 북쪽으로 피난 가기에 바빴다. 이 때문에 그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군주의 이미지를 갖게 됐다. 그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그가 도성을 버린 1592년 6월 9일(음력 4.30)에 극적으로 표출됐다. <선조실록> 수정판인 <선조수정실록>은 "어가가 나가자, 난민이 대거 일어났다"라며 "경복·창덕·창경의 3개 궁이 일시에 다 불탔다"라고 기술한다.

선조는 그처럼 분노의 대상이었지만, 임금 자리는 무사히 지켰다. 권력욕이나 뻔뻔함으로도 설명될 만한 일이지만, 그것으로는 다 되지 않는다. 희생양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인당 지도자인 서애 유성룡이 책임을 떠안은 것이 선조를 지키는 데 기여한 측면이 있었다.

출세 가도 달린 유성룡
 서애 유성룡
ⓒ 위키미디어 공용
유성룡은 임진왜란 50년 전인 1542년에 경상북도 의성에서 출생했다. 그가 과거시험에 최종 합격한 시점은 보수세력인 훈구파가 역사 무대에서 퇴장하기 직전이었다. 그는 22세 때인 1564년에 1단계 과거시험인 소과를 통과하고, 2년 뒤 대과에 급제했다. 이듬해인 1567년에 선조 임금이 즉위하면서 개혁세력인 사림파(유림파)의 세상이 열렸다.

유성룡은 의성 북쪽인 안동을 기반으로 했던 퇴계 이황(1501~1570)의 제자다. 이황을 따르는 사림파 선비들은 동인당을 구성했다. 이들은 동인당 내에서 남인 계열을 형성했다. 유성룡은 이황의 제자였기 때문에 훈구파 정권하에서라면 탄압이나 차별을 받기가 쉬웠다. 그러나 운 좋게도 과거급제 이듬해부터 훈구파의 퇴장을 목격하게 됐다.

장관급이 되기 전에 그는 상주목사 같은 목민관도 역임했지만, 승문원·예문관·춘추관·홍문관·사간원·사헌부 같은 학자 스타일의 관청에 주로 근무했다. 임금이 주는 유급 휴가를 받고 학문에 전념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특전을 누리기도 했다.

15세기 후반부터 훈구파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단일 대오를 유지했던 사림파는 훈구파를 퇴장시킨 뒤에는 자신들끼리 당쟁을 했다. 유성룡은 그 당쟁의 결과로 자신이 속한 동인당이 1582년 이후에 서인당을 제치고 집권당이 되는 과정을 목격했다.

1589년에는 같은 당 소속의 정여립이 역모사건에 휘말리면서 동인당이 정권을 잃고 핍박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화를 피했다. 선조는 서인당의 정철을 앞세워 동인당을 무력화시키면서도 유성룡과 이산해 같은 동인당 인사들을 보호했다. 서인당이 너무 과한 힘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2년 뒤인 1591년, 정권은 다시 동인당에게 돌아갔다. 서인당 지도자 정철이 눈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했다가 임금의 진노를 사면서 서인들이 타격을 입었다. 이는 서인들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놓고 동인당이 남북으로 분당되는 계기가 됐다. 정당해산심판제도가 있었다면 서인당 해산심판이라도 추진했을 만큼 강경 대응을 주문한 동인들은 북인당이 되고, 크게 보면 정치 동업자인 서인들에 대한 온건 대응을 촉구한 동인들은 남인당이 됐다.

정철이 선조의 미움을 산 직후에는 북인 계열인 이산해가 정국을 주도했다. 그러다가 남인당인 유성룡이 집권하게 된다. 북인 계열은 정여립과 가까웠다. 그래서 북인들은 1589년에 큰 타격을 입었다. 유성룡 같은 남인들은 화를 적게 입었고, 인적 손실이 적었다. 이 점은 처음에는 이산해가, 나중에는 유성룡이 정국을 주도한 한 가지 원인이다.

전쟁 피해 책임을 유성룡에게 떠넘긴 선조
 유성룡이 쓴 징비록
ⓒ 연합뉴스
또 다른 원인은 선조의 정국운영 방식과 관련됐다. 선조는 강경파들을 경계했다. 강경파는 타 정파와의 공존에 대해 열려 있지 않았다. 선조는 특정 당파가 집권당이 되더라도 다른 당파들에게 기회가 보장되는 시스템을 선호했다. 특정 세력의 독주를 막기 위해서였다. 이런 구도를 실현시키자면 북인당보다는 남인당이 집권하는 게 선조에게 유리했다.

그런데 '범'동인당 세력인 유성룡 정권을 위협하는 요인이 동쪽에 있었다. 1590년에 일본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시선을 열도에서 대륙으로 옮기면서 1591년에 출범한 유성룡 정권은 위기를 맞게 됐다.

조선은 유성룡 정권 출범 얼마 전부터 일본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이 파견된 것은 그 때문이다. 1589년 12월 25일(음력 11.18)에 사신으로 임명된 서인당 황윤길과 동인당 김성일은 1590년 4월 9일(음력 3.6)에 도성을 떠났다가 1591년 3월 25일(음력 3.1) 조정에 돌아와 업무를 보고했다. 서인 정권이 왕성할 때 떠난 사신단이 서인 정권이 기울어지는 시기에 복귀했던 것이다.

황윤길과 김성일 둘 다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우려했다. 하지만 이들은 소속 당파를 의식해 차별적인 보고를 내놓았다. 황윤길은 일본이 침략할 것이라고, 김성일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동인당 김성일이 그렇게 보고했다고 해서, 범동인당 정권이 대일 방어를 태만히 했던 것은 아니다. 육군본부 군사연구소가 펴낸 <한국군사사> 개설 편은 "일본의 침공 가능성을 느낀 조선은 보다 강화된 군사 대비책을 강구하였다"라며 호남과 영남의 성벽을 정비하고 영남에 참호를 설치했으며, 도(道) 단위의 방위 시스템인 제승방략체제를 탈피해 진관체제(군현 단위)로 복귀하려 했다는 점 등을 열거한다.

이런 조치들은 유성룡 정권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 대비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공을 막는 데 한계가 있었다. 건국 이래로 조선군의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여진족을 겨냥한 대북 방어에 최적화돼 있었다. 위 조치들은 그런 시스템을 전제로 한 것들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분열된 일본열도를 통합해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조선이 그런 에너지에 맞설 적응력을 갖추는 데는 다소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일본은 그런 시간을 주지 않고 신속히 침공을 단행했다.

1592년 5월 23일(음력 4.13), 일본열도를 대표하는 16만 대군이 부산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기병 중심인 여진족과 싸우는 데 익숙했던 조선군은 보병 중심인 일본군과의 전투에 얼른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6월 9일 선조가 도성을 탈출하고 경복궁 등이 불타게 됐다.

임금의 도성 탈출로 인해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 시점에서 선조가 꺼내 든 비장의 카드가 있다. 어가가 도성을 떠나 개성에 머물 때인 6월 11일(음력 5.2), 그는 만류하는 신하들을 가까스로 설득해가며 유성룡 파면을 관철시켰다.

음력으로 이 날짜 <선조실록>에 따르면, 선조는 '국방을 느슨히 했다', '미리 막지 못하고 적들이 무인지경에 들어오듯 하게 만들었다', '나는 일본을 경계했는데, 유성룡은 그렇지 않았다', '유성룡은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칠까봐 국방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등등의 말을 하며 파면을 밀어붙였다.

그런 뒤 선조는 서인당 윤두수에게 국정 주도권을 넘겼다. 도성을 잃은 혼란한 상황에서 남인당 정권에 책임을 떠넘기며 집권당을 교체했던 것이다. 정철 실각으로 정권을 빼앗긴 서인당은 이로써 1년 만에 재집권하게 됐다. 당쟁사를 정리한 이건창(1852~1898)의 <당의통략>은 윤두수와 정철이 중용되면서 "서인들이 점차 진출하게 되었다"라고 알려준다.

국정을 이끌던 유성룡이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으니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지는 것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언제라도 집권당 교체를 단행할 힘은 선조에게 있었다. 왕권이 비교적 강한 상태에서 유성룡이 조정을 이끌었을 뿐이다. 유성룡에게 과도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했다.

선조가 한양 궁성에 있을 때 그를 실각시키고 집권당을 교체했다면, 모양새가 그나마 나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선조는 피난 도중에 유성룡을 파면했다. 그것도 선조에 대한 비난 여론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그렇게 했다.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같은 정권교체에 힘입어 선조는 책임 문제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게 됐다. 선조는 희생양을 만드는 방식으로 자리를 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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