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에서 고개 숙여 사과...이런 검사도 있구나
흔한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 '오마이뉴스 기자 박정훈'과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 박정훈',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연대를 모색해 나갑니다. <편집자말>
[박정훈 기자]
"검찰의 역할은 범죄 피해자를 범죄 사실 자체로부터는 물론이고 사회적 편견과 2차 가해로부터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이 사건에서 검찰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고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작동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로서 마땅히 보호받아야 했을 최말자님께 가늠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드렸습니다. 사죄드립니다."
지난 23일 부산지법 352호 법정, 검사가 피고인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습니다. 뒤이어 검사는 말했습니다. "피고인에 대해 정당방위를 인정해 무죄를 선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남성에게 저항하다가 혀를 깨문 최말자씨를 '중상해죄' 혐의로 구속 수사하고 재판에 넘긴 검찰이 61년 만에 낸 사과문이었습니다.
1964년 5월, 만 18살이었던 최씨는 성폭행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최씨의 '정당방위'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반면 가해자는 강간미수를 제외한 특수주거침입 등의 혐의만 적용돼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최씨는 큰마음을 먹고 2020년에 재심을 청구했으나, 이 또한 1심과 2심에서 청구 기각됐습니다. 그러나 2024년 12월 대법원이 사건을 파기환송하고 재심이 결정되면서, 비로소 지난 23일 재심 첫 공판이 열리게 된 겁니다. 그리고 검사는 이날 심문 없이 곧바로 무죄를 구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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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년 7월 tvN <유퀴즈온더블럭>에 나온 정명원 검사 |
| ⓒ 유 퀴즈 온 더 튜브 캡처 |
"어떤 이의 하늘이 무너진 적이 있다는 사실을 그의 편지를 보고서야 안다. 공판검사가 하루에도 수십 건씩 받아 드는 선고 결과가 누군가의 하늘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안다. (...) 법정에서 공판검사의 말 한마디가 그 하늘이 무너지지 않게 하는 버팀목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가 말해주어 겨우 안다." (<유무죄 세계의 사랑법> 187p)
정 검사는 최근 낸 책 <유무죄 세계의 사랑법>에서 '후배 검사의 말에 큰 위로를 받은 한 피고인의 편지'를 소개하면서 위와 같이 말합니다. 말 한마디가 버팀목이 될 수 있다고요. 아마 그는 검찰이 틀렸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정하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것. 그것만이 수사기관과 사법부의 잘못으로, 수십 번도 넘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던 최씨를 위로하는 길이라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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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겉표지 |
| ⓒ 한겨레출판 |
그는 "(타인에 대한) 막막함과 몰이해를 자인하는 것" "내가 모르는 영역에 진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의 인정"(<친애하는> 32p)에서부터 검사의 일이 시작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인간을 선악으로 구분하기보다는, 입체적으로 바라보며 헤아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범죄란 언제나 누군가의 삶에서 빚어지고, 삶이라는 뜨거운 것에는 법률가가 미처 표에 담지 못하는 수많은 요소들이 있다."(<유무죄> 80p)
두부 공장에서 손가락이 잘리면서까지 평생을 일하다가, 노년이 되어 횡령죄로 구속된 어느 두부 공장 관리자의 이야기. 초임 검사의 설득에 법정에서 위증했던 청소년들이 울면서 자백한 사건, 집 앞에 무기를 들고 간 아들을 '존속 예비 살인'으로 기소하고자 했으나, 골목의 CCTV를 살펴 보고 '특수협박죄'로 피의자의 죄명을 바꾼 일 등등... 이처럼 정 검사의 책에는 '사이다' 대신 적당히 뜨거운 차 한 잔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명확하지도 통쾌하지도 활짝 펴지지 않는 비극, 좌절과 무력 앞에 끝내 애가 쓰이는 마음"(<유무죄> 123p)이 무엇인지 알겠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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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무죄 세계의 사랑법> 겉표지 |
| ⓒ 한겨레출판 |
그런데 정 검사의 '외곽주의자' 생활은 참 멋있습니다. 특히나 윤석열 정권에서 권력을 좇는 '중심주의자'들의 한심한 모습이 드러나면서, 더더욱 그와 같은 외곽주의자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외곽주의자를 "원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한 주변인이 아니라 스스로 찾은 외곽의 어느 지점에 머물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자"라고 정의합니다.
"나는 기소보다는 불기소를 더 잘하는 검사였다. 업무 영역에서 내가 받은 칭찬 중 대부분은 불기소장을 잘 쓴다는 것이었다. 무언가를 파고들어 그것이 처벌받아 마땅한 이유를 밝히고 더 엄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보다는 어떤 일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나 처벌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친애하는> 53p)
정 검사의 말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검사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은 인지·직구속 실적인데, 그의 스타일 자체가 실적 쌓기에는 좋진 않았던 겁니다. 하지만 두 권의 책을 낸 것에서 볼 수 있듯 그는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매우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국민참여재판'에서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경북 상주의 농약 사이다 사건을 비롯해서 아동학대 치사 사건, 금은방 강도살인 사건 등 다수의 국민참여재판을 맡았고, 2024년에는 공판 분야에서 최초로 '공인전문검사 1급(블랙벨트)'을 수여받았습니다. 2013년부터 시작된 공인전문검사 제도에서 1급을 받은 검사는 9명뿐입니다.
특수통·공안통이 아니더라도, 폭탄주를 마시지 않아도, '까라면 까'라는 지시에 충성하지 않아도, 무리한 기소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성공하고 존경받는 검사가 될 수 있음을 그의 존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검찰이라는 조직에서 더 많은 '외곽주의자'가 탄생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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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 검찰 깃발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모습. |
| ⓒ 연합뉴스 |
윤석열씨를 비롯해 수많은 검사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 말은, 정 검사가 사법연수원 시절에 요양원 봉사에서 풀을 뽑던 일화에서 나옵니다. 어떤 풀을 뽑아야 할지 헷갈리는 상황 사이에서 시골 출신의 정 검사가 '(뽑아야 하는 풀은) 작은 솜털이 있다'는 식으로 다른 연수생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연수생들 사이에서 "털의 유무"라는 기준이 세워지면서 '털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 수많은 풀이 무서운 속도로 제거됐다고 하니, 공연히 뽑혀 나간 풀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전 이사장은 2021년 11월 MBC <시선집중>에 출연해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을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에게 추천했습니다. 유 전 이사장은 "이 책은 인간다운 마음, 시민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 검사로 근무하면서 어떻게 자기 일을 대하는지, 어떻게 사건을 파고드는지 등을 다룬 에세이"라며 "사람다운 마음을 가진 검사가 그 일을 하면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이해하게 됐다. 권하는 이유는 알아서 (해석)하시라"라고 밝혔습니다.
정훈님, 아마 윤석열씨는 이 책을 안 봤겠죠? 그러니 '사람다운 마음을 가진' 대통령도 되지 못했을 겁니다. 그에게 야당이나 자신을 비판하는 국민들은 '이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수사를 통해 굴복시켜야 하는 대상이었을 겁니다. 윤씨는 이렇다 할 정치 경력 없이 검찰총장을 그만둔 뒤에 바로 대통령이 되고, 검찰 출신을 측근으로 두고, '유죄와 무죄' '검사와 피의자'라는 검찰의 이분법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국정을 운영하다가 결국 비상계엄까지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검찰주의자'였던 윤씨의 정치적 파산을 개인의 문제로만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껏 윤석열 정권을 받쳐주던 중요한 축은 '정적 제거'를 위한 수사를 펼치면서 동시에 김건희씨를 비호하던, 한편에선 감시받지 않고 '특수활동비'를 제멋대로 쓰던 검찰이었기 때문입니다. 범죄에 대해 세밀하게 다루며, 평범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하는 검찰이 '권력의 맛'에 취해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진창에 처박힌 존재의 안간힘과 함께 기꺼이 일렁이는 자'(<유무죄>, 289p)가 되자는 다짐도, "사건을 잘 처리했다는 성취 너머로 언제나 슬픈 얼굴을 한 사람이 있었다"(<유무죄>, 290p)는 깨달음이 없었기에 그랬을 겁니다.
검찰 개혁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생각하는 개혁은 시민들이 어디서나 '목이 꼿꼿하지 않은' 검사를 만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범죄 피해자의 눈높이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검사, 피의자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는 않되 그들의 삶을 헤아릴 수 있는 검사, 무리한 수사 및 기소를 했을 때는 사과하는 검사... 형사부·공판부를 강화하는 흐름 속에서,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 기꺼이 자세를 낮추는 검사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아래 정 검사의 호소를 많은 사람들이, 특히 검사들이 꼭 마음속에 담아두었으면 좋겠습니다.
"범죄의 땅을 일구는 방식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생각과 반성과 촉구가 내려앉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변해갈 것이다. 그 변화의 결과로 어떤 이름의 형사 사법 시스템을 구축하게 될지 단정할 수 없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바는 지금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범죄라는 이름의 재난 앞에 소중한 이들의 다정함을 지켜내고자 하는 것, 그러한 방식으로 인간이라는 연약한 종족에 대한 낙관을 잃지 않는 것."(<유무죄>, 8~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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