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570년 전 유학의 산실, '행정정사' 복원…사라진 학문 뿌리 되살린다

권식 선생 후손·주민·의성군이 함께하는
역사·학문 계승 프로젝트

경북 의성군 사촌마을 고즈넉한 돌담길과 굽이진 골목은 마치 15세기 초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이곳은 성리학이 지역사회의 질서와 교육을 이끌던 시절, 행정 권식(1423~1485) 선생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행정정사(杏亭精舍)'가 자리했던 곳이다.

570년 전, 행정정사는 학문과 예절, 공동체 윤리가 살아 숨 쉬는 사촌마을의 심장이었다. 그러나 세월의 풍화와 시대의 변화 속에 정사는 사라졌고, 마을의 정신적 뿌리 또한 희미해졌다.

이제 후손과 주민, 지자체가 힘을 모아 사라진 유학의 산실을 되살리는 대역사가 시작됐다. 지난달, 오랜 준비 끝에 복원 공사의 첫 삽이 떴다.

◆ "행정정사는 사촌 유학 전통의 심장"

사촌마을에서 정사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었다. 성리학적 가치가 구현되던 학문과 교육, 공동체 윤리의 중심지였다.

권식 선생은 입향 후 행단을 조성해 후학을 양성하고 문중 교육에 힘쓰며 지역 학문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그의 가르침은 수많은 학자를 길러내는 밑거름이 됐으며, 정사의 부재는 곧 유학적 가치의 단절을 의미했다. 이 때문에 주민들에게 정사는 오랜 세월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 "복원은 곧 학문 유산 회복"

전문가들은 행정정사의 복원이 단순한 건물 재현을 넘어 지역 학문사와 정체성을 회복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평가한다.

강현국 전 대구교육대학교 총장은 "행정정사는 사촌마을의 유교적 전통과 지적 공동체 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며 "이번 복원은 사라진 학문적 유산을 되살리고 후손들에게 뿌리 의식과 문화적 자긍심을 심어주는 중요한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복원 이후 행정정사는 전통 교육과 학술 교류의 장으로 거듭날 전망이다. 청소년에게는 유학과 예절 교육의 현장이, 학계에는 전통사상의 가치를 되새기는 학문적 자원이, 방문객에게는 한국 전통교육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기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 후손과 지자체가 함께 만드는 '살아있는 역사'

권식 선생의 후손들은 오랜 시간 사료를 수집하고 고문헌을 조사하며 복원 준비에 매달려 왔다. 권오진(83) 씨가 2억 원을 출연했고, 후손들이 모은 성금은 총 2억9770만 원에 달한다. 이들의 헌신이 복원의 밑거름이 됐다.

한 후손은 "정사는 가문의 정신이자 학문의 산실을 상징합니다. 이제는 후손들만의 힘이 아닌 지자체와 지역사회가 함께 이 역사적 가치를 되살려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의성군 관계자는 "정사 복원은 역사·문화·학문적 가치가 크며, 지역 발전과 교육 자원 확보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며 "문화재청과 협력해 실현 방안을 구체화하겠다"고 밝혔다.

◆ 570년의 숨결, 미래로 이어지는 학문의 길

행정정사 복원은 과거를 단순히 재현하는 작업이 아니다. 이는 사촌마을의 학문적 뿌리를 되살리고, 선조가 남긴 성리학적 가치와 교육 정신을 오늘날로 잇는 역사적 과업이다.

사라진 정사의 터전에서 다시금 학문과 문화의 숨결이 되살아나기까지, 후손과 주민, 지자체의 협력은 이제 막 새로운 역사의 장을 써 내려가고 있다.

지난 7월 25일 행정정사 상량식(上樑式)이 거행됐다. 상량식(上樑式)은 목조 건물의 골재가 거의 완성된 단계에서 대들보 위에 대공을 세운 후에 최상부 부재인 마룻대(상량)를 올리고 거기에 공사와 관련된 기록과 축원문이 적힌 상량문을 봉안하는 의식이다.

기자는 돌담길을 나서며, 과거와 현재가 맞닿는 이곳이 앞으로 어떤 이야기들을 만들어낼지 기대감을 안았다.

영남취재본부 권병건 기자 gbg@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