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근영의 아는 그림] 바보 호랑이

소나무 위에 호랑이가 다소곳이 앉았다. 긴 꼬리는 돌돌 말아 앞발 사이로 빼내 살랑살랑 흔든다. 부리부리한 눈이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지만 영 웃는 상이다. 까치 두 마리가 호랑이를 향해 뭐라 지저귀는 듯하다. 호랑이 털 한 올 한 올, 솔잎 한 잎 한 잎 공들여 그렸다. 나무 사이로 해가 떠오르고, 나무 밑엔 불로장생의 상징 영지가 자라고 있다. 그림 왼쪽에 ‘소나무는 한겨울을 이기고 호랑이는 사악한 기운을 쫓는다’고 적었다. 부산시립박물관 소장 ‘송하호작도’(松下虎鵲圖·사진)다. 정초 대문에 붙여 벽사진경(辟邪進慶·나쁜 귀신을 막고 복을 맞이함)을 기원한 19세기 민화다.

용맹의 상징 호랑이는 조선 후기 들어 부쩍 해학적으로 묘사됐다. 꼭 까치가 함께 나왔다. 맹수를 놀리는 작은 새, ‘까치 호랑이’라는 명명부터 까치가 주인공이다.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스토리는 동서고금 인기다. 성경의 ‘다윗과 골리앗’, 애니메이션 속 ‘톰과 제리’가 다 그렇다.
새해도, 호랑이해도 아닌데 까치 호랑이가 때아닌 인기다. 미국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덕분이다. 조선 시대 사인검(四寅劍)을 휘두르는 퇴마사 주인공에 이들이 즐기는 컵라면·김밥·새우깡까지 고증이 제법이다. 파랗고 동글동글한 호랑이와 갓 쓴 까치 콤비가 씬스틸러로 나왔다. 정리 강박에 빠진 듯 임무는 잊은 채 두툼한 앞발로 쓰러진 화분을 바로 세우려 애쓰는 바보 호랑이를 갓 쓴 까치가 한심한 듯 바라본다. 이 호랑이 굿즈마저 없어서 난리다. 벽사진경이 필요한 시대, 코리아니즘의 부상이다.
권근영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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