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아름다운 인간, 김병곤
민청련동지회에는 민청련 활동 중 정권으로부터 당한 폭압의 결과로 활동 중 혹은 그 이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많은 이들이 있다. 그 분들의 치열했던 삶의 흔적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민주항쟁 정신의 계승에 작으나마 보탬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민청련 두꺼비 열전'을 편찬한다.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 아닌, 무명의 헌신을 실천한 이들을 위주로 한다. 이름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헌신과 열정을 보여주는 삶의 스토리를 통해 민주항쟁의 정신을 기억하는 것이 목적이다. <기자말>
[권형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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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년 7월 석방되자마자 명동성당에서 열린 구속청년학생협의회 발족식에서 진선, 진관, 목우 스님을 소개하는 김병곤 |
| ⓒ 김병곤박문숙기념사업회 |
의견 다르나 조직 결정에 승복, 김병곤의 진정한 승리
김근태를 비롯해 전 간부가 구속되거나 수배되어 지하로 들어갔던 민청련도 6월항쟁으로 김근태를 제외한 간부들이 거의 석방돼 공개운동을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8월에 열린 총회에서 민청련은 김희택을 의장으로 김병곤, 박우섭, 장준영, 권형택을 부의장으로 선출하였다. 이 당시 김희택은 김병곤을 의장으로 추천하고 수락할 것을 종용했지만 김병곤은 끝까지 고사하고, 선배인 김희택이 의장을 맡도록 밀었다.
당시 김병곤이 의장을 고사한 것은 선배에게 양보하는 겸양의 뜻이 컸지만, 한편으로 6월항쟁으로 열린 공간에서 민중운동연합으로서 민통련을 강화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민통련에서 일하겠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병곤은 자신의 뜻대로 민청련 부의장으로서 민통련 정책실 차장을 겸하게 되었다. 정책실 차장은 정책실장 장기표가 구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정책실을 총괄하는 책임자 역할이었다. 그는 민통련 기관지 <민중의 소리>를 통해 민중운동이 중심이 되는 통일전선 건설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가면서 경기남부 민통련 건설 등 실제적인 조직 작업에도 박차를 가했다.
8월 말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12월 대선 일정이 구체화되면서 정국은 대통령 선거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어갔다. 김병곤의 생각은 6월항쟁 이후 열린 공간에서 중요한 것은 대중운동의 성장과 그를 바탕으로 한 민중운동 세력의 정치적 진출이고, 대통령 후보 문제는 2차적 문제로 보았다.
그러나 선거 국면에서 대중들의 관심은 누가 대통령 후보가 될 것인가에 쏠릴 수밖에 없었고, 국민운동본부, 민통련, 민청련 등 재야운동 단체는 이 대통령 후보 문제로 엄청난 갈등과 분열을 겪게 된다. 김병곤은 민중운동세력의 성장이 아직 미약한 상태에서 독자 후보를 내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보았으나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와 김대중-김영삼 양 후보의 '후보 단일화' 사이에서 개인적으로 많은 갈등을 겪었다.
그러던 중 김병곤이 속한 민청련과 민통련이 많은 토론과 조직적 진통 끝에 김대중 '비판적 지지'를 결정하자 김병곤은 그 결정을 지지하고, 수호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정을 끝까지 옹호하고 관철하려고 했다. 그의 건강에 결정적 타격이 된 구로구청 투쟁과 6번째 징역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김병곤의 조직인으로서의 자세에 대해 김근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정말로 신화로 만들어야 되는 것은 "사형을 주어서 영광입니다."가 아니고 병곤이의 바로 이 점, 자신의 의견과는 달리 내려진 공적 결정인 경우에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단호히 그것을 보위하는 것, 이것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병곤이의 위대한 승리입니다. 신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 모두의 미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영광입니다>, 거름,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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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년 8월 홍제동 성당에서 개최된 민통련 임시총회. 임채정 사무처장이 사회를 보았고, 오른쪽 끝에서 네 번째에 서 있는 김병곤은 정책실 차장으로 임명되었다. |
| ⓒ 김병곤박문숙기념사업회 |
이런 위기감이 김병곤으로 하여금 10월 7일 양김 초청 고려대 집회를 추진하게 한다. 이 집회는 국민운동본부 산하 청년학생공동위원회가 주최하여 전두환 퇴진과 거국중립내각 수립을 촉구하는 집회였다. 이 집회는 한편으로 양김 단일화가 협상이나 중재로 이루어지기 힘든 상태에서 투쟁 속에서 대중적 압력으로 양김 단일화를 이루자는 취지를 갖고 있었다.
문제는 김대중과 함께 단상에 서는 것을 꺼리는 김영삼을 어떻게 참석시킬 것인가였다. 이때 김병곤이 김영삼 쪽 교섭을 맡고 나섰다. 그는 김영삼 상도동 자택을 방문하여 일부 참모들이 강력히 반대했는데도 김영삼을 설득하여 집회 참석 약속을 받아내고 집회를 성사시켰다.
10월 7일 고대 집회는 10만 관중이 참석하여 뜨거운 열기를 보였다. 특히 그중 다수가 김대중을 지지하는 군중들로서 김대중의 연설에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그러자 바로 다음 날 김대중 측에서 '양김 대중집회에서 김대중 지지가 확인됐으므로 분당한다'고 하는 이른바 '분당 선언'을 함으로써 집행부의 취지가 무색하게 되었다. 결국 고려대 집회는 김대중의 평민당 분당의 길을 열어주었을 뿐 김병곤이 주장했던 '투쟁 속의 양김 단일화'라는 원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독배인 줄 알면서 받아들인 구로구청투쟁
1987년 12월 16일, 야권의 분열, 관권 금권 부정선거 시비로 얼룩진 대통령 선거가 민정당 노태우 후보의 당선으로 막을 내렸다. 6월항쟁으로 타올랐던 국민들의 민주화 열기는 급격히 싸늘하게 식어갔다. 정권교체를 열망했던 시민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과 체념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이때 그 속에서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살려 보려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병곤이었다. 대선 투개표 과정 중 서울 구로구청에서 부정선거로 의심되는 투표함이 발견되었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부정선거 관련 공무원들을 억류하고 구로구청을 점거했다. 경우에 따라서 대선 결과를 뒤집을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의 권력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그것은 결국 실현되지 못한 희망으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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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년 4월 구로구청 사건 재판에서 재판정에 서 있는 김병곤 뒷모습 |
| ⓒ 김병곤박문숙기념사업회 |
진압경찰의 진입이 예상되는 17일 밤 민통련에서는 의장 문익환 목사와 임채정 사무처장(후에 국회의장 역임)이, 민청련에서는 김희택 의장과 권형택 부의장이 구로구청에 있는 김병곤을 찾아가 현장에서 나올 것을 권유했다. 김병곤인들 할 수만 있다면 왜 나가고 싶지 않았겠는가. 민청련사건으로 2년여 감옥생활을 한 후 겨우 5개월 만에 다시 감옥에 갈 게 뻔한 상황이었으니. 그러나 당시 구로구청 상황은 그가 없으면 싸움을 지휘하기 어려웠고, 그 사실을 그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김병곤이 임채정에게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형님, 제가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자신이 그곳에 남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남기로 결심한 상태에서, 김병곤의 이 말은 '피하고 싶은 쓴 잔이지만 피할 수 없다면 감당하겠다는, 깊이 깨달은 한 인간의 간결한 고백'이었던 것이다.
투병 통해 민중의 고통 실감
구로구청사건은 법정에서 부정투표함 여부를 놓고 진실공방은 있었지만 가려지지 않았고, 결국 김병곤은 폭력 및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6번째 징역을 영등포교도소에서 살게 된다. 김병곤은 수감 중 88년 2월부터 극심한 복통에 시달려 중병을 감지하고 있다가 4달 후인 6월 2차례 정밀진단을 받고 위암 3기로 판정되어 가석방으로 석방된다.
김병곤은 자신의 위암에 대해서 두 가지를 원인으로 짚었다. 첫째는 대선 때의 분열상 같은 것들이 자신한테 준 충격 그리고 87년 여름에 출옥 이후 몸을 돌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대선과정에서의 정신적 충격을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했다.
김병곤은 출옥 후 바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여 서둘러 수술을 받았다. 수술 전 상태가 위중해 수술 결과에 대해 담당 의사들은 우려했지만 본인은 수술 결과가 괜찮다고 느꼈다. 6개월간의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도 잘 이겨냈다. 그리고 시골로 내려가 6개월간 휴양하면서 뜸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면서 상태가 다시 악화하기 시작하였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검진을 받은 결과 장유착으로 판명이 나서 2번째 수술을 받았다. 이때에 이미 김병곤의 몸은 일말의 기대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태였다. 수술 후 식사를 하지 못하고 수액에 의존하면서 서서히 체력이 악화하기 시작했고, 체중이 47kg까지 감소했다. 수술 후 마지막 일년 남짓한 기간의 투병생활은 죽음과의 한판 대결이었고 처절하고 기나긴, 힘겨운 노정이었다.
선후배들이 투병위원회를 조직하여 집회를 열었는데 여기에서 박형규 목사가 부르짖듯이 기도했다. "우리가 이토록 많은 사람이 모여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느님, 왜 기적을 보여주시지 않습니까" 하고. 인재근은 고통을 참지 못해 진통제를 놓아주기를 호소하는 김병곤을 두고 돌아서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몇 번이나 울었다. 마지막 일년 동안 암세포가 그의 모든 장기, 모든 세포, 심지어 머리카락 한올한올의 모근까지 퍼져나갔고, 운명하기 열흘 전에는 혈액까지 침투하여 수혈로 혈액을 바꾸어야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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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병 중인 김병곤과 오른쪽에 서 있는 부인 박문숙. 왼쪽에는 조화순 목사 |
| ⓒ 김병곤박문숙기념사업회 |
김병곤은 1990년 12월 6일 경기도 소래 신천리병원에서 부인 박문숙과 조화순 목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운명했다. 박문숙이 김병곤의 몸을 감았던 붕대를 뜯어내는 동안 조화순 목사는 내내 찬송가를 불렀다. 투병기간 내내 냉정할 정도로 꿋꿋했던 박문숙이 남편의 시신 위에 엎드려 몸부림치며 통곡했다. 김병곤은 김희택의 말처럼 "평소 '맑은 향기'를 풍기며 살았듯이 마지막 또한 똑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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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년 민청련 활동 중 회원 들 앞에서 강연하는 김병곤 |
| ⓒ 민청련동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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