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물 대가' 김은희 작가의 화려한 출발

양형석 2025. 7. 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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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보는 아재] 국과수 배경으로 만든 박신양-김아중 주연의 <싸인>

[양형석 기자]

좋아하는 감독의 새 영화가 개봉하면 열 일 제쳐두고 극장을 찾거나 영화를 볼 때 배우보다 감독을 먼저 보는 열성 영화팬이 아니라면 사실 영화감독이 대중적으로 얼굴이 널리 알려지긴 쉽지 않다. 하지만 장항준 감독은 봉준호 감독, 박찬욱 감독과 함께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감독 중 한 명이다. 이미 여러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화려한 입담과 개그맨을 능가하는 뛰어난 예능감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들에게 매우 익숙한 장항준 감독은 정작 본업인 영화 연출에선 큰 힘을 쓰지 못했다. 데뷔작 <라이터를 켜라>로 서울관객 47만을 동원한 장항준 감독은 2017년 전국 138만 관객을 동원했던 <기억의 밤>까지 흥행작이 단 두 편에 불과하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반면에 <불어라 봄바람>과 <리바운드>는 높은 기대치에도 전국 관객 100만을 돌파하지 못하며 흥행에 실패했다.

하지만 장항준 감독에게도 전국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던 히트작이 존재하는데 이는 영화가 아닌 드라마였다. 재미 있는 사실은 장항준 감독은 이 작품에서도 10회까지만 연출을 맡고 11회부터는 아내와 함께 각본 작업에 전념했다는 점이다. 지금은 장항준 감독의 히트작보다 '장르물의 대가' 김은희 작가의 지상파 드라마 데뷔작으로 더욱 유명한 박신양, 김아중 주연의 SBS 드라마 <싸인>이다.
 <싸인>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전면에 내세운 첫 번째 드라마였다.
ⓒ <싸인> 홈페이지
남편과 함께 완성한 김은희 작가의 지상파 데뷔작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후 SBS에서 예능 작가로 일했던 김은희 작가는 사수였던 장항준 감독을 만나 1998년 결혼했다. 당초 김은희 작가는 작가로서 큰 꿈이 없었지만 종이로 쓴 남편의 시나리오를 컴퓨터로 옮기는 일을 도와주면서 글쓰기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김은희 작가의 데뷔작은 스릴러가 아닌 멜로 영화 <그 해 여름>이었는데 <그 해 여름>은 전국 33만 관객으로 흥행에 실패했다.

2010년 장항준 감독과 함께 쓴 tvN 드라마 <위기일발 풍년빌라>를 통해 드라마 집필을 시작한 김은희 작가는 2011년 장항준 감독의 드라마 연출 데뷔작이었던 <싸인>으로 지상파에 데뷔했다. 김은희 작가는 <싸인> 집필 당시 흔치 않은 장르물인 데다가 경험도 부족해 어려움을 겪었지만 남편의 도움을 받아 작품을 잘 마무리했고 <싸인>은 25.5%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닐슨코리아 시청률 기준).

<싸인>을 통해 SBS와 좋은 인연을 맺은 김은희 작가는 2012년과 2014년 <유령> <쓰리 데이즈>를 차례로 집필하면서 장르물에 강한 작가로 명성을 높였다. 그러던 2016년, 김은희 작가는 김혜수와 이제훈, 조진웅 주연의 <시그널>을 통해 '장르물의 대가'로 떠올랐다. <시그널>은 탄탄한 스토리와 배우들의 호연으로 13.4%의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고 김은희 작가는 백상예술대상 극본상을 수상했다.

김은희 작가는 3년의 준비 끝에 2019년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의 각본을 썼고 2개의 시즌과 외전까지 총 3편에 걸쳐 공개된 <킹덤>은 'K-좀비'의 매력을 알리며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김은희 작가는 2021년 <킹덤:아신전>의 주인공 전지현을 앞세운 <지리산>이 재미와 완성도, 시청률에서 모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승승장구하던 김은희 작가에게는 데뷔 후 처음 겪는 슬럼프였다.

하지만 김은희 작가는 1년의 공백을 깨고 2023년 SBS의 오컬트 드라마 <악귀>를 통해 돌아왔다. <악귀>는 낯선 장르임에도 11.2%의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많은 사랑은 받았고 김은희 작가는 2024년 한국방송대상 작가상을 수상하며 건재를 알렸다. 2024년 장항준 감독이 연출한 영화 <리바운드>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던 김은희 작가는 2026년 1월 방송 예정인 <두 번째 시그널>의 각본 작업을 마쳤다.

웰메이드 드라마에 찬물 끼얹은 '방송사고'
 박신양은 3년 만에 출연한 드라마 <싸인>에서 열연을 펼치며 건재를 보여줬다.
ⓒ SBS 화면 캡처
굳이 < CSI 과학수사대 > 같은 미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최근엔 <검법남녀>와 <소방서 옆 경찰서 그리고 국과수>처럼 법의학을 다룬 드라마들이 종종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2000년대까지만 해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법의학은 메인 스토리가 아닌 곁다리로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국과수를 배경으로 법의학을 전면에 내세운 <싸인>은 시청자들에게 낯설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싸인>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던 장항준 감독이 연출하고 아내 김은희 작가가 각본을 쓴 드라마로 화제가 됐지만 장항준 감독은 11회부터 김형식 PD에게 연출을 맡기고 각본진에 이름을 올렸다. 장항준 감독은 <싸인>이 끝난 후 SBS 예능프로그램 <밤이면 밤마다>에 출연해 "졸려서 더 이상 연출을 할 수 없었다"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훗날 드라마의 실시간 제작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사체가 남긴 죽음의 흔적(SIGN)으로 사망의 원인(死因)을 찾는다는 뜻을 가진 드라마 <싸인>은 1회 시작과 함께 최고 인기 아이돌 멤버 서윤형(건일 분)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이야기의 출발을 알린다. 이후 다른 여러 사건들이 펼쳐지지만 결국 이야기는 돌고 돌아 '서윤형 사망사건'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윤지훈(박신양 분)은 자신의 몸을 증거로 만들어 미스터리로 남았던 마지막 사건을 해결한다.

<파리의 연인>과 <쩐의 전쟁>으로 두 번이나 SBS 연기대상 대상을 수상했던 박신양은 2008년 <바람의 화원> 이후 <싸인>을 통해 햇수로 3년 만에 복귀했다. 의사, 그것도 법의학자 역할은 처음이었지만 박신양의 뛰어난 연기와 지적인 이미지 덕분에 캐릭터가 매우 잘 어울렸다. 특히 윤지훈과 대립하는 이명한 원장 역의 배우가 허준을 연기했던 전광렬이었기에 시청자들의 몰입도는 더욱 높아졌다.

탄탄한 스토리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긴장감 넘치는 연출이 조화를 이룬 범죄 미스터리 스릴러의 수작으로 꼽히는 <싸인>은 마지막회에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바로 드라마의 에필로그 부분에서 갑자기 화면조정 컬러바가 뜨는 방송사고가 나온 것이다. 방송 당일까지 급하게 촬영을 하고 부랴부랴 편집을 해 방송 직전에 겨우 송출을 하는 당시 드라마의 열악한 제작 환경을 보여준 어두운 단면이었다.

신인이라 더욱 소름 끼쳤던 사이코패스 연기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 강서연 역의 황선희는 <싸인>이 드라마 데뷔작이었다.
ⓒ SBS 화면 캡처
지난 5월 소속사와 결별한 후 차기 행보를 모색하고 있는 김아중은 <싸인>에서 과학 수사관 출신의 신참 법의학자 고다경 역을 맡았다. 드라마 초반에는 < CSI >를 보고 법의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가볍게 말했지만 사실은 동생에게 '묻지마 범죄'를 저지른 범인의 증거를 찾기 위해 법의학자가 됐다. 열정만 넘쳤던 고다경이 훌륭한 법의관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싸인>의 큰 재미 요소였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반전 매력을 가진 애순(아이유 분)의 계모 나민옥을 연기했던 엄지원은 <싸인>에서 윤지훈의 전 여자친구이자 서울중부지방검찰청 강력부 검사 정우진 역을 맡았다. 초반에는 검사로서의 정의감보다 신분을 상승하려는 욕구가 강하게 드러나지만 갈수록 진심을 가지고 수사에 뛰어든다. 정우진은 멜로 요소가 부족한 <싸인>에서 최이한 형사(정겨운 분)와의 러브 라인을 보여주기도 했다.

영화 <아저씨>에서 중간보스 종석,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코믹한 김비서를 연기하며 다양한 매력을 보여준 김성오는 <싸인>에서 묻지마 살인 사건의 용의자 이호진을 연기했다. 이호진은 게임 개발자를 꿈꾸던 인물로 자신이 쓴 살인 게임의 시나리오대로 계획 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가문의 수치'로 여기던 부모를 살해하려 했지만 최이한 형사의 총에 맞고 검거된다.

<싸인>이 드라마 데뷔작이었던 황선희가 연기한 '최종보스' 강서연은 유력한 극 중 대선 후보의 딸이자 혼자서 직·간접적으로 무려 5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다. 일단 자신의 행보에 방해가 된다 싶으면 숨통을 끊고 보는 무시무시한 사이코패스인데 드라마 속 마지막 피해자가 바로 주인공 윤지훈이었다. <싸인>으로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황선희는 2013년 <주군의 태양>에서도 악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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