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생이 만년필을 쓰는 학교가 있습니다 [김덕래의 만년필 이야기]
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기자말>
[김덕래 기자]
7월 10일부터 일주일 동안, 총 3회의 릴레이 강연을 했습니다. 강남구립 청담도서관에서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미동초등학교 강연은 학부모들과 함께하는 자리였습니다. 어디가 더 좋았다 말하기 힘들 만큼, 각각의 의미가 달랐습니다.
학부모 대상부터 고등학생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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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남구립 청담도서관 일반인 강연 [만년필, 잉크 위를 걷는 시간 - 만년필과 사람을 잇다] |
| ⓒ 김덕래 |
디지털 디톡스Digital detox의 일환으로 독서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 비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적은 세상입니다. 역설적으로 책을 가까이 하는 행위 자체가 힙하게 여겨집니다. '이왕 책을 손에 쥐었으니 야무지게 읽어보자. 한발 더 나아가 필기구를 손에 쥐고 노트에 옮겨 적어보자, 내 손을 움직여 무언가를 쓰는 행위 자체가 정서적인 안정감을 줄 테니.'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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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동초등학교 학부모 강연 [AIDT 시대의 노모포비아 극복을 위한 독서 필사] |
| ⓒ 김덕래 |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가 근무하는 학교에 수학 문제를 만년필로 푸는 학생이 있어요. 또 들판에 핀 꽃잎을 빻아, 딥펜에 찍어 그림 그리는 친구도 있고요. 그런 아이들을 모아 '만년필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일상에 지친 학생들에게 깜짝 선물을 해주고 싶어요. 어른에게만 힘든 세상은 아니니까요. 김포에서 김제까지 꽤 먼 거리란 건 알아요. 와주신다면 저를 포함한 교사와 학부모들은 물론, 학생들이 가장 기뻐할 거예요."
학생들을 시대 흐름에 뒤처지게 길러내도 곤란하지만, 정서적인 안정감을 갖게 해주는 것도 그 못잖게 중요하다.. 난 그게 마땅한 교사로서의 책무, 먼저 태어난 어른으로서의 도리라 여긴다.. 이런 말로 들려 한달음에 내려갔던 게 벌써 2년 전 일입니다.
김제는 전과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건물들도, 도로로, 길가에 난 꽃들도 그때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학교는 안팎으로 많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2년 전 선생님이 <오마이뉴스>에 쓴 지평선고등학교 시리즈 기사를 보고, 한 만년필 업체에서 연락을 해왔어요. 만년필 동아리가 있는 학교라는 말이 반가웠다며 다방면으로 후원해 줘 얼마나 고맙던지요. 학생들을 서울로 초대해 무료 프로그램도 진행해 주고,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놀라지 마세요? 이젠 전교생이 다 만년필을 쓰고 있어요. 물론 만년필 동아리도 여전하고요. 얼마 전엔 손글씨 대회도 열었답니다."
정말 본관 2층에 학생들이 쓴 손글씨 수십 점이 걸려 있었습니다. 만년필 동아리가 있는 학교란 것만으로도 놀랄 만한데, 전교생이 다 만년필을 한두 자루 이상 갖고 있다는 말에 눈이 저절로 커졌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다 만년필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사용하다 문제가 생겼을 때 자가 조치하는 법도 학생 입장에서 풀어 설명했습니다. 말로 듣는 건보다 팔과 다리를 움직여 몸으로 기억하는 게 더 효과적이니, 중간중간 몇 명씩 나와 함께하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선생님은 어떤 계기로 만년필 살려내는 일을 시작했나요?"
"한동안 안 쓴 만년필을 스스로 손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펜을 떨어뜨리지 않았는데도 잉크가 뚝뚝 끊기며 나오는 이유는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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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평선고등학교 고교생 강연 [만년필과 디지털 디톡스] |
| ⓒ 김덕래 |
IT 용어 중 기고GIGO(Garbage in, Garbage out)라는 말이 있습니다. 단순 번역하면, "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가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좋은 결괏값은 얻기 위해선, 좋은 데이터를 넣어야 한다는 말로 의역됩니다. 좋은 데이터가 경제적 지원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교사는 교사대로 막막할 때가 많고, 또 학부모는 학부모대로 기운 빠질 일이 많은 세상입니다만, 그중 가장 혼란스러운 건 학생입니다. 아직 성장을 다 마친, 내적으로 안정화된 시점이 아니니까요.
반복된 자극은 중독에 불러오지만, 이로운 경험은 사람을 지혜롭게 합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안에는 무수히 많은 정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나의 것은 아닙니다. 마치 내 것인 양 여겨질 때도 있지만, 눈으로만 훑은 지식은 바람처럼 흩어지기 쉽습니다. 정보가 너무 없어도 곤란하지만, 지나치게 많아도 문제가 생깁니다.
"손은 눈보다 빠르다." 영화 <타짜>에서 평경장 역을 맡았던 배우 백윤식의 명대사입니다.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손이 눈보다 빠른 이유는 '체득'에 있습니다. 체득의 사전적 의미는, 내 몸을 써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숏폼Short-form은 이미 대세입니다. 하지만 내 눈을 스쳐 지나가는 영상에서 지식을 뽑아내어 내 것으로 만드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활자화된 글을 읽는 행위로 섭취하는 편이 현명하고, 그걸 노트에 옮겨 적는 동안 확실한 나의 것이 됩니다.
아빠가 이번 달 여러 곳에서 강연이 잡혀있다고 했더니, 고등학교 2학년인 둘째 딸이 이 말을 꼭 전해달랍니다.
"아빠. 내가 중학생 땐 전과목 과제물을 다 손으로 써서 냈거든? 그런데 고등학교에 올라왔더니, 구글폼으로 내라는 과목들이 점점 늘어나더라고? 처음엔 어색했지만 하다 보니 익숙해지고, 언제부터인가 더 편한 거야. 그런데 1학년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손으로 써서 내라는 선생님이 있어. 한 학생이 물어봤지. 왜 선생님만 손글씨 과제를 고집하냐고 말이야. 선생님이 뭐라고 한지 알아?
"너희가 쓴 글씨... 솔직히 너희들이 봐도 알아보기 힘들지? 선생님은 오죽하겠니. 그런데 선생님까지 구글폼을 써버리면 너희들 손글씨 쓸 일이 그만큼 줄어들 거 아냐? 안 그래도 복사, 붙여넣기에 익숙할 텐데 말이야. 선생님은 적어도 너희들 졸업할 때까진 바꿀 마음 없으니 그런 줄로 알아."
야구의 꽃은 투수입니다. 얼마나 정확한 제구력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투수의 가치 평가가 달라집니다. 아무리 빠른 공을 던져도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나면 볼일 뿐이니까요. 반면 유능한 타자의 덕목은 선구안입니다. 지금 내게로 날아오는 공이 스크라이크인지 볼인지 가려낼 줄 모른다면 배트는 허공을 가를 뿐이고, 기껏 쳐내더라도 파울볼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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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교생이 만년필을 쓰는 김제 지평선고등학교 |
| ⓒ 김덕래 |
덧붙이는 글 | 2023년 여름, 총 3회에 걸쳐 교사, 학생, 학부모의 입장에서 본 시리즈 기사를 썼습니다. 2년 전 지평선고등학교는 '만년필 동아리'가 있는 학교일 뿐이었지만, 이제는 전교생이 다 만년필을 쓰는 학교가 되었습니다. AIDT 시대를 맞아 녹록잖은 교육 현실이지만, 타개책은 분명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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