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들 학자 맞아? 영화보다 더한 정권교체 공작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5. 7. 26.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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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교체의 명장면들] 선비들의 정치 투쟁

[김종성 기자]

귀족이 노비를 사병으로 활용하던 조선 초기까지는 유혈투쟁에 의한 정권교체가 많았다. 1398년에 이방원이 이성계-정도전 정권을 붕괴시키고 1453년에 수양대군(세조)이 단종-김종서 정권을 붕괴시킨 것이 그런 사례들이다.

철학자이자 유교 수행자인 선비들이 정치의 주역이 된 선조 즉위(1567) 이후로는 그런 식의 정권교체가 격감했다. 1623년에 보수세력이 광해군 정권을 전복할 때 군사 쿠데타가 동원되기는 했지만, 이는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선비들은 직업 특성상 유혈투쟁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들은 학문적 토론을 통해 상대 진영의 문제점을 노출시키다가, 임금이 하사하는 죽음이라는 형식으로 정적을 사사(賜死)시키는 데 익숙했다. 이들의 권력투쟁에서는 창검보다는 사약이 핵심 수단이었다. '의약품'을 주된 정치 무기로 활용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처럼 선비들의 권력투쟁은 이전 시기에 비해 덜 폭력적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방식이 과거보다 항상 나았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선비답지 않은 유치한 방식이 동원될 때도 있었다. 우주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다는 성리학자들이 잔머리를 굴리는 모습도 많이 나타났다.

'삼정승' 체제의 균열
 아계 이산해 영정
ⓒ 위키미디어 공용
그런 사례 중 하나가 임진왜란 전년도인 1591년에 있었다. 1589년에 조작 냄새가 물씬한 정여립 역모사건으로 인해 정권을 빼앗긴 동인들이 1591년에 정권을 되찾은 방식은 '이들이 학자가 맞나?'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들 정도다. 이 사건의 출발점은 선조 임금의 후계자 문제였다.

열다섯 때인 1567년에 삼촌인 명종을 뒤이어 임금이 된 선조는 서른아홉이 되는 1591년까지도 후계자를 두지 못했다. 1569년에 혼인한 세 살 연하의 의인왕후 박씨에게서 자녀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1591년 당시 선조에게는 임해군·광해군·의안군·신성군 등 여덟 왕자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후궁 소생이었다. 그중 하나를 세자로 책봉할 수도 있었지만, 선조는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선조는 '왕의 서얼'도 아니고 '왕의 서얼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정통성이 약했던 그는 서얼 후계자를 두는 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정들로 인해 세자를 세우는 건저(建儲)가 하염없이 지연됐다. 후계자인 저위(儲位)를 책봉하는 건저가 즉위 이후 24년간 지연되는 이 상태는 정치 불안정을 조성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삼정승이 이에 관한 논의를 개시했다.

이때는 서인당이 집권할 때였지만, 야당 인사 둘이 삼정승 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쟁사를 정리한 이건창(1852~1898)의 <당의통략>은 "역옥(逆獄) 이후로는 시론(時論)이 다 좌상 정철에게 돌아갔지만, 영상 이산해와 우상 유성룡도 주상에 의해 임용돼 있었다"고 말한다.

동인인 정여립이 역모사건에 휘말린 뒤로는 좌의정 정철(1591년에 55세)이 정국을 주도했지만, 야당 인사인 이산해(52세)와 유성룡(49세)도 삼정승을 구성했다는 설명이다. 이산해는 동인당의 분파인 북인으로, 유성룡은 동인의 또 다른 분파인 남인으로 분류된다.

종6품 정읍현감이었던 이순신이 46세 때인 1591년 2월 24일(음력 2.1) 유성룡의 추천을 받고 정3품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파격 승진한 사건은 조선 수군이 1년 뒤 임진왜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는 원인이었다. 여당 1인, 야당 2인으로 구성된 삼정승 체제가 결과적으로 조선을 살린 셈이다.

이 체제는 집권당을 견제하는 선조의 의중을 반영하지만, 삼권분립이 없었던 시절의 정치 풍경도 반영한다. 삼권분립 하에서는 행정부 장악에 실패한 야권 인사들이 입법부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지만, 그런 분립이 없는 체제에서는 야당 사람들에게도 행정부 자리를 만들어주는 게 왕실에 유리했다. 정치적 역량을 가진 인물들이 제도권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면 그들이 반체제세력의 일원이 될 수도 있어서다.

율곡 이이(1536~1584)와 더불어 서인당의 구심점이었던 우계 성혼(1535~1598)의 문집인 <우계집>은 건저 논의를 처음 제안한 인물이 유성룡이라고 말한다. 유성룡이 제창한 이 논의의 관건은 누구를 추대할 것인가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실상 정해져 있었다. <우계집>은 "조정의 논의는 모두 광해군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삼정승은 '누구를 추대할까'보다는 '어떻게 이슈화시킬까'에 논의를 집중해 '함께 주상을 알현해 주청하자'는 결론을 도출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알려진 서화가이자 저명한 문장가인 영의정 이산해는 두 정승과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고려 말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의 7대손이자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의 조카이며 제자인 그는 이 기회를 다른 용도로 활용할 결심을 굳힌다.

<당의통략>에 따르면, 그 이전에 이산해는 '정철·성혼이 이산해를 숙청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그래서 정철을 경계하고 있던 차에 정철과 함께 세자 책봉 문제를 논의하게 된 그는 이 일을 세자 책봉이 아닌 정권교체의 기회로 만드는 공작에 착수하게 된다.

헛소문 퍼트려서 권력 잡은 이산해, 귀양 간 정철
 충북 진천 정송강사에 모셔져 있는 정철 영정
ⓒ 연합뉴스
1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둘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데서도 나타나듯이, 선조는 광해군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을 예상하기 힘들었던 1591년 시점에 선조가 가장 좋아하는 왕자는 신성군이었다.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다. 가장 좋아하는 후궁이 신성군의 어머니인 김인빈(인빈 김씨)이었기 때문이다.

이산해는 그런 선조의 의중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선조의 심리를 활용해 선조와 정철을 갈라놓는 작업에 착수한다. 두 정승과 함께 선조를 알현하기로 한 날의 전날이었다. 이산해는 의안군과 신성군의 삼촌이자 김인빈의 동생인 김공량과 접촉했다. <당의통략>에 따르면, 그는 김공량에게 "지금 정(鄭) 재상이 광해군을 세워 신성군 모자와 당신을 죽이려 한다"고 귀띔했다.

이산해는 사실과 거짓을 섞은 스토리를 김공량의 귀에 집어넣었다. 정철이 광해군을 추천하고자 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성군 모자를 죽이려 한다는 것은 거짓이었다. 선조가 좋아하는 신성군을 정철이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가 김공량과 김인빈을 통해 선조에게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이산해의 의도였다. 건저 논의의 제안자는 '정 재상'이 아니라 '유 재상'이었지만, 이산해는 정권교체를 위해 그 부분을 과감히 조작했다.

정철이 신성군을 죽이려 한다는 말에 깜짝 놀란 김공량은 곧바로 궁에 들어가 누나에게 보고했다. 선조보다 세 살 적은 36세의 김인빈은 급히 선조를 찾아갔다. "인빈은 주상께 울면서 호소했다"고 <당의통략>은 묘사한다. 김인빈은 정철이 광해군을 추천할 것이며 그것은 자기 모자를 죽이기 위한 일이라고 호소했다. 선조는 설마 했다. 이 책에 따르면, "주상은 믿지 않았으며, 이것은 헛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는 다음날 생각을 바꾸게 됐다. 김인빈의 말대로 정철이 정말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당의통략>은 이산해는 몸이 아프다며 빠지고 유성룡만 동행했다고 알려주고, <우계집>은 유성룡과 이산해 둘 다 동행했다고 알려준다.

정철이 세자 책봉을 건의하자, 전날 들은 말이 있어서인지 선조는 대번에 격노했다. <당의통략>은 "주상이 대노했다"고 말한다. 선조는 "지금 내가 여전히 감당하고 있는데, 경은 무엇을 하자는 것이오?"라고 따져 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격한 반응이 나오자, <당의통략>에 따르면 실제 제안자인 유성룡은 한마디도 못 하고 그저 지켜만 봤다. <우계집>에 따르면 유성룡과 이산해는 입도 떼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결국 이 사건은 정철이 단독으로 벌인 일이 됐다. 뒤이어 이산해의 지휘하에 동인당 관료와 재야 유생들이 정철 탄핵을 맹렬히 촉구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음력으로 선조 24년 윤3월 14일 자(양력 1591.5.6) <선조실록>에 따르면, 엘리트 선비들이 포진한 사헌부와 사간원은 "정철이 조정의 기강을 농단하고 위세가 세상을 누르고 있으니 파직을 청합니다"라고 주청했다. 선조는 그렇게 하라고 재가했다.

정철에게만 불똥이 튄 게 아니었다. 계속되는 탄핵 공세로 서인당 전체가 타격을 입고 주도권을 상실했다. 이 때문에 정권은 2년 만에 동인당 수중으로 돌아갔다. 1591년의 여야 정권교체는 선비의 위신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이산해의 과감한 약속 깨기, 진실과 거짓을 섞는 속임수, 매정한 안면 몰수 등에 힘입어 성사됐다.

서예가이자 문인인 이산해의 행동으로 인해 선비들답지 못한 정권교체가 된 1591년의 이 사건은 시인인 정철의 행동으로 인해 다소나마 멋을 띠게 됐다. "재 너머 성 권농 집에 술 익었던 말 어제 듣고"라는 시조로 유명한 그는 유배자 신분으로 남대문을 통과해 용산 쪽으로 걸어가다가 술친구를 만났다. 거기서 술판을 벌이며 나눈 대화가 '이정면이 시를 잘 짓고 술을 즐기며 세상살이에는 담박했는데 술병 때문에 코끝이 붉어지자 스스로 주부코라고 호를 지었다'라는 긴 제목을 가진 시에 나온다.

정철은 "청담이랑 농담이랑 섞어가며 격렬히 술을 마시다 보니 강가의 하늘이 저물었었지"라고 그 시에 썼다. 어처구니없는 공격을 받고 정권을 잃은 정치 지도자가 유배 가다 말고 왕궁 인근에서 밤새 술을 마시며 수다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이 시대가 그래도 선비 정치인들의 시대임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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