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 시큰둥했던 남편을 확 바꾼 3평짜리 공간

김현진 2025. 7. 26.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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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밭을 일구며 주운 시적 순간들, 긴이로 나쓰오 <시인의 텃밭>을 읽고

[김현진 기자]

3평 텃밭에서 나는 작물이 이토록 풍성할 줄 몰랐다. 시댁과 가까운 지인에게 나누어 주어도 냉장고에 채소가 떨어지지 않는다.

봄부터 수확할 수 있었던 상추는 겉절이로 매일의 밥상에 올랐고, 잎을 따줄수록 더 많이 자라는 바질은 페스토로 변신해 여름 식탁을 즐겁게 한다. 뜻밖에 수확량이 많았던 가지는 아이가 좋아하는 가지 그라탱으로, 호박은 칼집을 내어 스테이크처럼 구워 근사하게 먹었다.

토마토 수확이 시작되자 토마토를 갈아 토마토 소스를 끓였고 방울토마토는 마리네이드 해 저장해 둔다. 이 모두가 사 먹는 것과 맛이 다르다. 내가 직접 길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땅의 기운이 응축되어 맛의 농도가 진하다.

주말 텃밭을 만나고 달라진 남편
▲ 애플 수박 올해 수확한 애플 수박은 단 두 개. 작아도 생김새와 맛은 수박
ⓒ 김현진
주먹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애플 수박은 생김새가 앙증맞고 귀여워 자라는 내내 우리를 기쁘게 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애플 수박을 딴 날엔 세 식구가 둘러앉았다. 칼을 찔러 넣자 "쩍-" 하고 갈라졌다. 드러난 속은 고스란히 수박의 색과 모양을 지녔다. 작다고 무시하지 말라는 듯, 여느 수박만큼 단물이 가득했다.

"방울토마토가 병에 걸린 것 같아. 병충해이거나."

어느 주말 텃밭에 간 남편이 급하게 전화를 걸어 이런 소식을 전했을 땐 울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제 한창 수확기에 접어들었는데 병충해라니. 남편이 보내준 사진 속 토마토에는 상처에 생긴 딱지 같은 게 붙어 있다. 한두 군데가 아니라 밭 전체로 퍼질 기세라 남편은 급한 대로 괜찮은 토마토를 수확해왔다. 아직 익지 않아 푸른 토마토들.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진한 맛을 농축할 시간인데, 그 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 열매의 삶이 안타까웠다(토마토는 후숙해 먹을 수 있어 다행이지만).

하지만 누구보다 속상한 사람은 남편일 것이다. 몇 달간 들인 수고와 정성이 병충해로 물거품이 된 셈. 한숨을 푹푹 쉬는 남편의 마음을 알 것 같아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깟 방울토마토가 아니라 너무도 소중한 방울토마토일 테니까. 적당히 익어 붉어진 토마토를 우리에게 선보이고 싶었던 게 남편의 바람이었으니까.

손바닥만 한 텃밭을 꾸리면서 가장 많이 변한 건 바로 남편이다. 회사 일에 지쳐 매사에 시큰둥하던 그가 식물 하나가 잘 자라는지, 열매는 잘 맺혔는지, 무슨 문제는 없는지 수시로 텃밭을 들락거렸다. 식물들이 무럭무럭 자랄 때 가장 환하게 웃었던 사람도 그다. 그런 그의 모습을 곁에서 보며 식물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는 걸, 가치가 바뀌면 한순간에도 삶이 변모한다는 걸 확인했다.

되돌려 받는 마음

텃밭을 통해 인생이 바뀐 사람을 또 한 명 안다. 긴이로 나쓰오라는 일본 시인이다. 그는 일과 결혼, 아이들 뒷바라지도 끝마친 초로에 텃밭을 가꾸기 시작한다. 혼자가 되어 고향 집으로 돌아가 길 건너편 버려져 있던 작은 땅에 자연농법으로 작물을 키운다.

경작하지 않기, 비료와 농약 사용하지 않기, 풀이나 벌레를 해롭게 여기지 않기를 기본으로 하는 자연농은 지나치게 힘을 들이지 않으면서 여자 혼자 자급자족의 삶을 꾸려가기 좋은 방법으로 보인다. 하나둘 재미 삼아 식물을 키우던 시인은 어느새 텃밭 생활의 보람과 즐거움에 빠져 이것저것 다양한 식물을 재배하고 텃밭의 크기를 늘려간다. 생명이 있는 존재는 죽을 때까지 성장하려는 성질이 있음을 깨달으며 텃밭에서 삶에 필요한 지혜와 인생의 행복을 길어 올린다.

모든 일이 세상을 대하는 자기 방식에 감응해 되돌아온다. 내가 베푼 것에 반응한다. 그리고 그에 맞는 답을 준다. 편지를 보내면 답장이 오는 것처럼. 마음에 정성을 가득 품으면 그것들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 185쪽, <시인의 텃밭> 2025년 3월 출간
 책 표지
ⓒ 차츰
그런 저자의 경험과 지혜가 남달리 와 닿았던 건 나도 올해부터 텃밭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남편이 주도하고 열을 올리는 농사라 나는 일주일에 한 번 간신히 들러 수확을 도울 뿐이지만 그런데도 얻는 기쁨과 배움이 크다.

손수 돌본 식물이 무럭무럭 자라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따와 달게 먹는 과정을 통해 땅과 식물, 우리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느낀다.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지구라는 시스템 안에서 서로 돌보고 순환하는 관계라는 걸 실질적으로 체험한다. 또한 정성과 관심을 보이는 만큼 식물은 성장하고 선물처럼 열매를 건넨다. 대상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로 돌아온다는 것도 텃밭 생활은 알려준다.

나보다 더 길게 텃밭 생활을 하며 경험과 비법을 쌓은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만큼 신뢰할 만하고 일정 부분 경험했던 터라 더 크게 공감이 되었다. 적은 양으로 귀하게 요리하고 신중하게 음미할수록 음식이 더 맛있어진다, 호기심과 알고자 하는 마음을 유지하면 인생이 행복해진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 내게 기쁨을 주는 대상, 내게 맞는 방식을 추구하며 천천히, 자분자분 지속하는 삶이 행복한 인생이라고 저자는 전한다.

나는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 그 사실이 너무 기쁘다. 알고 싶은데 모르는 게 많은 상태, 그것이야말로 생에 보물 같은 게 아닐까? 다시 한번 정리해 본다. '지금은 잘 모르지만 앞으로 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것.' 내게 보물이란 그런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절대로 소중한 보물이 될 수 없다. - 226쪽

많은 문장이 엄마에게, 혹은 인생의 선배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이다. 먼저 삶을 살아 깨달은 이의 경험과 성찰이 담긴 지혜, 막막한 삶에서 등대처럼 바라보고 싶은 가치를 책에서 구할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 희미했던 불빛이 선명해진 기분이다.

삶이라는 정원을 가꾸는 일

내가 좇을 등대의 빛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천천히, 과정을 음미하며, 삶에서 내게 좋은 것들을 모으기. 호기심을 잃지 않고 알고 싶은 마음을 유지하면서 내면의 소리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기. 그곳에 삶의 기쁨과 나의 소명이라는 것도 있을 테니까. 대신 작은 것에 정성을 들이고 적은 것에서 충만함을 느끼기, 좁아도 깊어지기, 배우고 깨달으며 성장하길 멈추지 않기. 그렇게 삶이라는 정원을 잘 가꾸다 보면 자연스레 타인을 초대해 무언가를 나누는 일도 생길 것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그것만 깨달으면 무슨 일이 닥쳐도 괜찮다.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어떤 존재라도,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다. 그곳에 가 닿을 수 있다. - 269쪽

이 책을 텃밭 생활이 궁금한 이에게, 혹은 삶의 영감이 필요한 이에게, 작지만 천천히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싶은 이에게 권한다. 특히 한껏 애를 써 단 번의 성과를 내는 방식이 아닌 힘을 뺀 자세로 오래도록 즐거움을 이어가 보고 싶은 이에게 .

문득 우리 집의 내년 텃밭 생활이 궁금해진다. 올해 미처 해보지 못한 것, 실패한 걸 내년에 다시 시도해보자 생각하며 내년의 즐거움을 준비한다. 겨울을 위해 여름 채소를 땅에 묻어두듯 나이가 들어도 즐길 무언가를 삶에 저장하는 중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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