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이 8가지나... 손풍기 대신 양복 안주머니에 든 것
'인문학적 붓장난'은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만나는 사유와 글쓰기의 기록입니다. 사십 년 편집자의 삶이 녹아든 이 조용한 장난이 누군가의 마음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기를 바랍니다. <기자말>
[이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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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채 모음 시원한 부채 바람. |
| ⓒ 이명수 |
명창의 외침이 허공을 가른다. 팔목이 한 바퀴 휘돌며 손에 쥔 부채가 쫙 펼쳐지는 순간, 한 폭의 그림처럼 무대 위에 선명한 선이 그어지고, 공기가 갈라진다. 그 틈 사이로 이야기가 스민다. 부채는 단순한 소품을 넘어, 무대의 리듬이자 장면을 전환하는 문이 된다. 심봉사의 지팡이로, 이몽룡의 얼굴을 가리는 장막으로, 흥부의 톱질 소리로 변주되며 부채는 장면마다 새로운 존재로 환생한다.
손끝에서 시작된 한 동작이 무대의 여백을 열고, 그 여백에 이야기가 숨을 쉰다. 나에게도 부채는 그저 바람을 부치는 도구 이상이다. 해마다 여름이 오기 전, 인사동에 가서 백선(白扇) 몇 자루를 장만하는 일이 여름을 맞이하는 의식처럼 느껴진다.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양복 안주머니에는 늘 한 자루쯤 부채가 들어 있다.
손풍기 대신 '백선'을 드는 이유
요즘 젊은이들은 손풍기를 들지만, 나는 부채의 조용한 여백, 손끝의 느린 바람이 더 정겹다. 에어컨은 시원하지만 삭막하고, 부채는 조용히 말을 건네며 여름을 함께 건넌다. 값비싼 예술품은 아니지만, 백선 위에 시 한 줄을 쓰는 순간 그 부채는 하나의 세계가 된다. 바람보다 글씨가 먼저이고, 시보다 마음이 앞선다. 바람을 부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부채는 본디 더위를 식히기 위한 도구였지만, 조선 시대 선비들은 그 쓰임새를 '팔용선(八用扇)' 또는 '팔덕선(八德扇)'이라 부르며, 단순한 실용을 넘어 풍류의 철학으로 정리했다.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써본 여덟 가지는 곧 여덟 갈래 삶의 방식이다.
1. 청풍을 일으킴 : 손목을 흔들어 여름의 더위를 쫓는다.
2. 작열을 가림 : 햇볕을 막아 이마 위 그늘을 드리운다.
3. 낯을 숨김 : 어색한 순간, 부채로 얼굴을 가려 마음의 여유를 찾는다.
4. 충해를 물리침 : 날벌레를 쫓으며 작은 평안을 지킨다.
5. 비를 막음 : 갑작스러운 소나기 속, 머리 위 즉석 우산이 된다.
6. 지시와 초빙 : 선비가 정중히 손님을 초대하듯, 부채로 품위 있게 방향을 가리킨다.
7. 창법 도우미 : 육자배기 한 가락에 흥을 실어 무대의 리듬을 돋운다.
8. 풍류를 즐김 : 선면에 생각 한 줄을 써넣으며 삶의 멋과 여유를 드러낸다.
이 여덟 가지 쓰임새는 모두 '바람'이 아닌 '관계'를 향한다. 몸과 자연, 사람과 사람, 나와 감정 사이를 잇는 다리. 부채는 그저 실용을 넘어선 사유의 도구이자, 품격을 띤 삶의 태도다.
마음을 부치는 바람
나는 부채가 일으키는 바람을 '선풍고아(扇風高雅)'라 부른다. 비록 내가 만든 말이지만, 이 말엔 오래된 품격을 담고 싶었다. 단지 더위를 식히는 바람이 아니라, 사유를 불러오는 고요한 여백. 무더운 날 부채를 부치며 한 줄 시를 떠올리는 순간, 마음의 열기는 스르르 식어간다.
더위보다 뜨거운 것은 언제나 마음이다. 억울함, 분노, 갈증 같은 감정들이 속을 끓일 때, 나는 부채를 집어 들고 천천히 부친다. 그 움직임 속에서 나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고, 눈동자 속에도 맑은 바람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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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淸風滿扇 맑은 바람이 부채에 가득하네 |
| ⓒ 이명수 |
"청풍만선(淸風滿扇) 맑은 바람이 부채에 가득하네."
백선은 나에게 작은 우주다. 그 위에 쓰는 글씨는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마음의 결이다. 그 결이 바람을 일으키고, 마음의 먼지를 조용히 날려 보낸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무더운 여름날, 방바닥에 앉은 어머니가 둥근 부채로 내 이마를 부쳐 주시던 장면. 그 바람은 단지 시원함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 자장가보다 깊은 위로, 찬물보다 시원한 온기. 그 바람 속엔 여름의 더위도, 어린 나의 근심도 모두 스며 있었다.
지금 내가 백선 위에 글씨를 쓰는 이유는, 어쩌면 그 손길을 되살리는 일이 아닐까. 단지 '풍류'를 위한 붓장난이 아니라, 살아온 시간에 대한 작고 단단한 예의처럼.
바람은 시를 싣고, 부채는 그 시를 펼친다
요즘 '부채질한다'라는 말은 종종 부정적으로 쓰인다. 누군가를 선동하거나 부추긴다는 의미로 말이다. 댓글에도 "부채질 그만하라"는 표현이 더러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살짝 불편하다. 원래 부채는 마음을 다스리는 도구였고, 여름을 함께 나는 벗이었다.
"부채질한다고 시원해집니까?"
누군가 묻는다. 나는 조용히 웃는다. 말로는 다 설명 못 할 시원함, 마음의 열기를 식히는 그 한 줌의 바람을 그는 아직 모른다. 부채가 일으키는 것은 단지 공기의 흐름이 아니다. 나와 감정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한 줌의 여백. 그 틈에서 우리는 웃고, 생각하고, 쉬어 간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겨울에도 부채를 들었다. 습관이었는지,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였는지, 중국 사람들은 '겨울에도 부채 드는 민족'이라 놀렸지만, 나는 오히려 그 안에 조선의 풍류가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나는 여름 산행을 할 때도 배낭에 백선을 한두 자루 챙긴다. 혼자 앉아 붓을 들어 바람을 쓰듯 한 자 한 자 쓱쓱 쓴다. 누군가 그 부채를 받아 들고 시원한 바람을 느낀다면, 그것이 내가 붓을 드는 이유다.
오늘도 나는 부채를 든다. 한 손엔 바람을 부치는 부채, 다른 손엔 마음을 적시는 붓. 그리고 마음 한편에는 오래된 시 한 편을 간직한다.
"바람은 시를 싣고, 부채는 그 시를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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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든다. 아차산에서. 心 팔만대장경을 260자로 줄이면 반야심경이 되고, 반야심경을 다시 5자로 줄이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로 압축되며, 일체유심조를 1자로 압축하면 마음, 즉 心이 된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든다. |
| ⓒ 이명수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 '축성여석의 방'에도 실립니다.당부의 말씀: 만약 게재가 된다면 사진 1~8은 뺄 것은 빼고 모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밭 전(田) 자 모양으로 두 장 두 장을 배치하든지, 석 장 석 장을 배치하든지 보기 좋게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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