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히 설득력..." 대법관들도 김재규에게 흔들렸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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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과 서울고등법원. |
| ⓒ 권우성 |
김재규에게 적용된 죄목은 요즘 우리 사회의 화두와 맞닿는다. 그에 대한 상고심 선고일이자 5·18 광주학살 3일차에 발행된 1980년 5월 20일 자 <동아일보>에서 확인되듯, 이영섭 당시 대법원장은 사형선고를 확정하기 직전에 "김재규 피고인 등 7명에 대한 내란목적살인 등에 대한 상고사건 판결 선고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처럼 김재규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같이 내란죄의 적용 대상이 됐다. 김재규에게 적용된 법조문은 당시 형법 제88조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처한다"였다. 이 조문은 2020년 12월 8일에 "대한민국 영토의 전부 또는 일부에서 국가권력을 배제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처한다"로 개정됐다.
윤석열은 계엄선포를 정당화하기 위해 남북 간의 전쟁이나 무력충돌을 유도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또 인명손상 가능성에 대비해 '시신 백'을 대량 주문했다는 의혹도 제기돼 있다. 그의 내란이 인명 살상으로 이어졌다면, 45년 전 김재규에게 적용됐던 죄목이 윤석열에게도 해당할 수 있다.
자신의 거사는 내란목적살인 아니라는 김재규
그러나 김재규는 자신이 내란범이 아니라고 외쳤다. 그는 1980년 1월 28일에 제출한 항소이유보충서에서 "본인이 결행한 이번 10·26 거사는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혁명이었습니다"라며 "5·16과 10월유신을 거쳐 완전하게 말살시켜놓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놓기 위한 혁명이었습니다"라고 역설했다. 10·26 이전에 내란상태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주장을 내놓았던 것이다.
1972년 12월 27일 공포된 유신헌법은 제47조에서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규정하면서 중임을 제한하지 않는 방식으로 박정희를 사실상의 종신직 황제로 만들었다. 또 대통령이 의장인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국회의원 3분의 1을 선출하게 함으로써 의회제도·삼권분립·국민주권 등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국헌을 문란시키는 내란이므로 이런 내란상태를 종식시키는 자신의 거사는 내란목적살인이 아니라는 게 김재규의 주장이었다.
김재규 변호인단도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김재규의 1심 최후진술이 있었던 다음날인 1979년 12월 19일 <조선일보>에 제시된 변호인단 변론 요지가 그것을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 김재규를 변호한 안동일 변호사는 "이번 사건을 내란죄로 다스리는 것은 부당하다"며 단순살인죄의 적용을 촉구했다. "내란죄란 국헌문란 즉 민주적 기본질서를 폭동에 의해 파괴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내란목적살인의 경우 폭동의 고의가 없거나 있다 해도 폭동의 실행행위에 나가지 않은 때는 그 해당성이 없으니 국헌문란 목적이 결여된 경우는 단순살인죄의 적용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명했다.
"국헌문란의 정의"라는 제목이 달린 당시 형법 제91조는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과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로써 국헌문란의 개념을 정리했다.
대법원은 김재규가 헌법상의 국가기관을 전복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계획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1980년 5월 20일에 나온 대법원 판결문은 "피고인들에게 이 사건 범행에 있어 현행의 헌법 또는 법률이 정한 정치적 기본조직을 불법으로 파괴하고자 하는 확정적 인식 또는 미필적 인식이 있었다고 아니 할 수 없고"라고 판시했다.
'국가기관을 파괴하려는 확정적 고의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그런 고의가 없었을지라도 자신의 행위로 인해 국가기관이 파괴될 가능성을 인지하면서 행동에 착수하는 미필적 고의는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었다. 확정적 고의든 미필적 고의든 내란죄의 고의를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던 것이다.
그런 뒤 대법원은 박정희 개인을 죽인 게 아니라 대통령이라는 헌법기관을 죽인 것이라는 김재규의 주장을 배척했다. "단순히 구체적인 헌법기관인 자연인만을 살해한 것에 불과하다고는 할 수 없으며, 또한 그 목적은 직접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피고인 김재규의 경우 범행 후의 정부수립에 대하여도 구체적으로 구상되어 있었다고 할 것이다"라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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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혐의로 재판정에 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
| ⓒ 국가기록원 |
"피고인 김재규는 이 점에 관하여 소위 유신체제가 그 성립과 존속에 있어 민주국가의 정치적 기본조직을 파괴하고 있어 이 건 범행은 오로지 그 민주회복을 위한 것이었다는 내용으로 강력하게 변소하고 있는 바, 그 변소는 이 사건 진행과정에서 점차 체계화된 것으로서 위 피고인 본인이 제출한 항소이유보충서에서 잘 표현되어 있는 바와 같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유신체제가 국헌문란 상태이므로 민주회복을 위해 결행했다'는 김재규의 주장에 대해 동조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김재규의 말이 일리가 있어 보인다고 긍정한 것이다. 전두환 군부세력의 눈치를 살피는 당시의 대법관들이 볼 때도 김재규의 논리에 수긍되는 측면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 세력이 1979년 12월 12일의 제1차 쿠데타에 이어 1980년 5월 17일의 제2차 쿠데타(비상계엄 확대조치)를 일으킨 것도 모자라 광주에서 대학살극까지 벌이던 때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법원은 "상당한 설득력"을 무시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의 다음 문단은 아래와 같다.
"그러나 현행 헌법이 논지가 지적하는 바와 같은 일부 비민주적인 규정을 두고 있는 것은 시인되나, 현행 헌법도 우리나라가 민주공화국임과 주권재민을 천명하고 있고 인권을 보장하는 등 국민의 기본권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으며 3권이 분립되어 있는 등 그 근본에 있어 민주헌법에 속한다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유신헌법 자체가 주권을 찬탈한 불법적인 범법이거나 민주국가의 정치적 기본조직을 파괴한 것에 해당하여 그 자체가 내란상태라는 소론은 너무나 과장된 것으로서 독단에 지나지 아니하므로 고려할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범행이 민주회복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 대하여도 앞서 살핀 바와 같은 사정만으로는 허구의 것임이 명백하거니와..."
바로 앞에서는 "상당히"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김재규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고 했다가, 다음 문단에서는 "(내란상태 운운은) 너무나 과장된 것으로서 독단에 지나지 아니하므로"라고 판시했다.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해놓고 '너무나 과장되고 독단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앞뒤가 맞지 않는 두 개의 판단을 연달아 내놓았던 것이다.
이는 '유신체제가 내란상태'라는 김재규의 주장에 대해 대법관들의 생각이 충분히 정리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치밀한 분석과 충분한 숙고를 거쳤다면 이런 식의 엉성한 판결문을 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윤석열이 합법적인 대통령 권한을 행사한 게 아니라 국헌을 파괴하는 내란을 일으켰다는 점에 대해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은 공감하고 있다. 이런 공감이 한국 현대사 속의 비상계엄 내란들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연쇄작용을 미칠 필요가 있다. 대통령 박정희가 벌인 것들도 내란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 이번 김재규 재심을 통해 명확히 밝혀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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