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낭만과 순정, 이 영화엔 그대로 있습니다

김성호 2025. 7. 25.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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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1117]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김성호 평론가]

한때는 있었다. 낭만이란 것이, 또 순정이란 것이 말이다. 빠르게 희소해지다가 이제는 목격하지 못한 지가 벌써 수 년은 된 것 같지만, 우리 곁에 분명히 낭만과 순정이 있었던 때가 있었다.

낭만과 순정이 멸종위기에 처한 건 자연스런 일이다. 낭만이란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에서 벗어나서야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것이고, 순정 또한 따지고 계산하지 않는 상황에서 발휘되는 때문이겠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란 갈수록 계량화되고 빗대기 쉬워지며 표준과 비표준을 확연히 갈라 나누는 방향으로 옮겨오지 않았나. 모두가 한 치라도 더 나아지기 위해 경주하는 이 시대에 낭만과 순정을 지키는 이는 진즉에 뒤쳐져 돌아봐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를 흉내 내는 이라면 모를까.

그리하여 낭만과 순정을 아껴온 나와 같은 이조차 벌써 십여 년 동안 그를 채 몇 번 목격하지 못 하고 산다. 나는 그를 불행하게 여긴다.
▲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스틸컷
ⓒ 튜브엔터테인먼트
낭만과 순정의 대표주자

영화도 현실을 반영하게 마련이다. 대중영화에서조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낭만과 순정이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그를 귀하게 여기는 채 한 줌 안 되는 이들은 현실에선 마주하기 어려운 낭만과 순정을 예술에서나마 찾아 추억하였으나, 이제는 그조차도 힘들게 되었다. 낭만이며 순정을 작품 안에 담아낼 줄 아는 감독이 빠르게 사라져가는 때문이겠다.

이와이 슌지를 빼고 낭만과 순정을 논할 수는 없다. 분명히 지금도 물리적으로 살아는 있지만, 지난 세기에 제가 가진 재능의 대부분을 놓고 온 이가 이와이 슌지다. 일본에서보다도 한국에서 더 인지도가 높은 듯한 그를 한국인들은 <러브 레터>, 혹은 < 4월 이야기 >나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감독으로 기억한다. 좋아하는 이는 얼마 없어도 <하나와 앨리스>라거나 <립반윙클의 신부> <키리에의 노래>를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 테다. 그 모두가 <러브 레터>로부터 출발한 것일 테지만, 무튼 이와이 슌지는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영화감독인 것이다.

<러브 레터>와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이와이 슌지의 정서가 담뿍 녹아든 두 편의 영화다. 주지하다시피 <러브 레터>는 죽은 애인의 첫사랑과 편지를 나누며 죽은 이를 새로이 이해해가는 여자의 이야기로,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청승도 그런 청승이 없겠으나 영화는 그를 몹시 아름답게 그린다. 이미 죽은 애인을 웬 설원에서 목놓아 부르며 안부를 묻고 답하는 이의 모습이, 또 십수 년의 세월을 건너 도서대출카드 뒷면에 그려진 그림으로부터 죽어버린 이가 품었던 마음을 확인하는 이야기가 현실적으로는 전혀 쓰잘데기 없는 것이지만 보는 이에게는 전혀 다른 묵직한 감상을 안기는 것이다.
▲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스틸컷
ⓒ 튜브엔터테인먼트
이와이 슌지의 숨겨진 걸작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세기 초에 나온 작품이지만, 세기말의 감수성을 가장 잘 담아낸 영화로 손꼽힌다. 연기 경력이 일천한 아마추어 배우들이 기용됐다는 점부터 인터넷 게시판에서 독자와 쌍방향 소통하며 쓰인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됐다는 점, 무엇보다 따돌림과 첫사랑 같은 학창시절 사건들을 두루 다루며 그 안에 지난 세기의 정서를 담뿍 담아낸 덕분일 테다. 사소하고 소소하여 지나간 뒤엔 떠오르지 않을 만한 이야기지만 결코 가벼이 보지 않으려는 마음이 이 영화 안에 들어 있다고,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아끼는 이들은 입을 모아 말하고는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이 슌지를 진정으로 아끼는 이들은 다른 어느 영화 못잖게 이 작품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을 지지하고는 한다. <러브 레터> 만큼 대중적이진 않아도, <릴리 슈슈의 모든 것>처럼 특징적이지 않아도, 낭만과 순정, 그 모두가 순도 높게 담겨 있는 그 시절 이와이 슌지의 작품이란 이유에서다. 일본과 정식 문화교류협정이 맺어지지 않아서 제작된 지 10년 뒤에나 소리소문 없이 개봉했던 이 영화가 이달 재개봉에 이른 것도 그와 같은 소수 영화팬의 선명한 지지 때문이겠다.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는 어떤 작품인가. 앞서 적었듯, 나는 이 영화야말로 지난 시대의 정서, 그 중에서도 낭만과 순정이 담뿍 담긴 작품이라 말하고 싶다. 영화 속에 담긴 몇몇 장면이며 에피소드는 일본 영화사 전체를 가로질러 각별히 낭만적이고 순정 있는 순간이라 평가할 수 있을 정도다. 영화를 본 지 십수 년이나 지나서도 그와 같은 장면에 대하여 '옌타운 간판 장면'이라거나 '글리코의 마이웨이 신', '지폐 불태우는 장면', '입간판 목격 신' 등으로 생생히 떠올리는 이들도 많다. 나 또한 그중 하나다.

영화는 1990년대 일본에서 바라본 근미래의 어느 날이다. 세계경제가 재편돼 일본 엔이 기축통화 수준의 힘을 얻고, 전 세계 노동자들이 엔화를 벌기 위해 일본으로 옮겨왔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한다. 흔히 그러하듯 이주노동자들이 값비싼 도심에서 살아가긴 어려운 일이다. 도시 외곽엔 엔을 벌러 왔다고 해서 옌타운(Yen Town)이라 불리는 동네가 형성된다. 일본 내국인들은 이 동네를 무시하지만, 옌타운 사람들은 그들 나름으로 서로를 보듬고 또 등치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스틸컷
ⓒ 튜브엔터테인먼트
소외되고 낙후된 땅에 귀한 것이 있다

주인공은 이름 없는 소녀(이토 아유미 분)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중국계 이주민 여자가 시체안치소에 누워 있는데, 이 자리에 온 이들은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누구 하나 나서 그녀와의 관계를 증명하지 않는다. 우리로 치면 그녀가 불법체류자인 때문이다. 이 자리엔 죽은 이의 딸도 와 있는데, 그녀 또한 죽은 이와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부정하지도 않지만.

엄마가 죽어 기댈 곳 없어진 소녀는 이리저리 떠밀리다 매춘부 글리코(차라 분)에게 거둬지게 된다. 처음엔 소녀를 탐탁찮게 여기던 그녀는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그녀를 떠맡았지만, 차츰 정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글리코는 소녀에게 호랑나비를 뜻하는 아게하라는 이름을 주고, 가까이 지내는 이들을 소개한다. 페이 홍(미카미 히로시 분), 랑(와타베 아츠로 분), 흑인 복서 출신인 아론 등이다. 기댈 곳 없이 혼자였던 아게하가 일본 내국인이 찾지 않는 교외, 그것도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뚜렷한 직업 없는 주변인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야기가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를 이룬다.

이 영화가 왜 좋으냐를 묻는다면 난감해진다. 영화의 줄거리를 말하라 하면 딱 잘라 이것이다 하고 말하기가 어렵다. 옌타운을 주름잡고 있는 중국계 조직이 위조지폐를 만들 수 있는 필름을 입수하려다 그것이 우연히 아게하와 그 패거리 손에 들어온다는 것, 글리코가 가수로 크게 성공하는 과정에서 소속사에 의해 일행과 떨어지게 된다는 것, 두 가지 흔하고 통속적일 수 있는 이야기가 제멋대로 얽혔다 풀어지며 영화가 끝난다는 게 전부인 것이다. 온갖 상황을 겪고 나서도 아게하와 그 패거리가 처한 상황이 근본적으로 나아지거나 하는 것은 아닌데, 영화를 보고 난 이들의 마음과 또 아게하의 마음에 분명히 전과 달라진 파동이 일어난다는 게 이 영화가 특별히 기억되는 이유일 테다.

말하자면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가 어째서 훌륭한 작품인가를 언어로 잡아 글로써 표현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다만 이 영화는 성공을 동경하는 주변인의 욕망을, 관계를 갈망하는 외로운 인간의 갈망을, 그 가운데서 몰락하고 지탱되는 순간, 나아가는 선택과 그렇지 못한 결정들을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겠다. 그 장면들을 영화는 아름답게 채집한다. 이를테면 우연치 않은 사건으로 죽음을 맞은 일본인 조직폭력배를 암매장하고 돌아오는 길, 아게하와 그 패거리가 탄 트럭 뒷자리 풍경이라거나, 일본 정부가 뒤쫓고 있을 게 분명한 위조지폐를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방법으로 무지막지하게 생산해내는 장면, 또 저를 떠나가 다시는 잡을 수 없게 된 옛사랑을 바라보는 모습 등을 이 영화는 너무나 어여쁘게 포집하고 있는 것이다.
▲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포스터
ⓒ 튜브엔터테인먼트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변치 않는 아름다움

마치 극중 글리코가 부르는 '마이 웨이'가 그러하듯, 처음엔 어색하고 낯선 이 영화의 분위기는 그것에 적응하기만 하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감상을 남긴다. 일본 내국인이 좀처럼 발 들이지 않는 소외된 지역에도 얼마든지 인간적인 삶이 있다고, 어쩌면 도시에서 멸종된 것처럼 보이는 낭만이며 순정 같은 것이 도리어 이 버려진 땅에 있을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어떤 눈에는 낙후된 우범지대일 수 있는 옌타운이, 실은 가장 고귀한 삶들이 모여 있는 곳일 수 있음을 짚어내는 감성이 그 시절 이와이 슌지에겐 있었던 것이다. 또 그를 알아보는 눈들 또한 그 시절엔 분명히 있었다.

거리낌 없이 다른 이들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시대다. 뒤처지고 낙후된 것은 더는 존중받지 못한다.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속 아게하의 패거리가 그렇듯이, 옌타운으로 밀려나고 그곳에서도 더 소외된 지역으로 몰려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들에겐 돌아볼 무엇도 없다고 무시되고 폄훼되기 십상이다.

이 영화가 아름다운 것은 돌아봐지지 않는 곳을 진득하게 바라보는 시선이며, 그곳에 도리어 더 귀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기대, 그리고 마침내 그 기대를 현실화시켜내는 실력까지가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와이 슌지가 옌타운에서 캐낸 건 낭만과 순정이며, 조건과 이해득실을 넘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오가는 감정과 감성이다. 나는 이와 같은 것을 요 근래 작품에선 거의 보지 못 하였다.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를 보고 나서야 우리는 정말이지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귀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영화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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