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어'... 외로움을 나눈 두 영혼
[한별 기자]
자작나무가 가득한 숲 가운데 정글짐이 놓여 있는 무대. 아직 관객들이 입장하고 있는데 무대에서 뭔가 움직인다. 공연 시작 전 추위에 떨며 분주하게 숲을 오가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서서히 암전된다. 연극 <렛미인>은 그렇게 시작된다. 다음달 16일까지 서울 중구에 있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된다.
<렛미인>에는 뱀파이어 소녀와 학교 폭력의 피해자인 소년이 등장한다. 뱀파이어 소녀 곁에는 그녀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며 피를 구해주는 하칸이 있고, 소년에게는 알코올에 의존하며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잠을 자는 엄마가 있다. 하지만 이런 기형적인 관계 속에서도 두 아이는 여전히 깊은 외로움을 느낀다. 두 사람 주변에는 어른들이 있지만,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뱀파이어 소녀 일라이는 소년 오스카의 옆집으로 이사 오면서 만나게 된다. 그들이 서로의 전부가 되는 과정은 연극을 통해 드러난다. 어색한 말투와 행동은 털어놓을 곳 없이 각자의 인생을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둘은 서로를 알아가며 점차 의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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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렛미인> 빈무대 연극 <렛미인>의 빈무대 전경이다. 자작나무 숲 배경에 정글짐 구조물이 놓여 있다. 가로등의 불 말고는 어둑해 스산한 느낌을 준다. |
| ⓒ 한별 |
뮤지컬의 안무만큼 역동적이지는 않지만, <렛미인>의 움직임은 안무 이상의 깊은 인상을 남긴다. 특히 오스카가 자신을 괴롭히는 가해자들과 싸우는 상상을 할 때, 여러 배우가 함께 등장해 단체 군무처럼 보이기도 하고 오스카의 여러 내면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폭력이나 살인 등 격렬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배우들의 몸짓은 음향이나 조명 효과 이상으로 해당 장면의 긴장감을 극대화했다.
이번 공연을 제작한 것은 <렛미인>의 원작 프로덕션이다. 한국에서는 초연부터 원작 프로덕션의 디자인을 그대로 사용하는 레플리카 프로덕션의 형태로 공연이 올라왔다. 공연을 관람하면서 느낀 낯섦은 이런 프로덕션 방식 때문이리라. 무엇보다 한국 프로덕션 같지 않았던 이유는 행동과 상황 연출이 매우 섬세하고 치밀했기 때문이다.
학교폭력, 살인 등 어두운 소재가 등장하는 만큼 공포심을 자극하는 연출도 더러 있다. 하칸이 일라이를 위해 살인 후 피를 빼내는 장면에서는 진짜 피처럼 보이는 특수분장 효과를 사용한다. 미리 알지 못하고 공연 관람에 나선다면 놀랄 수 있다. 제작사 역시 공지를 통해 중학생 이상의 두려움 없는 십대들부터 관람할 수 있으며 고등학생 이상 관람을 권장한다고 밝혔다.
오스카 역의 천우진 배우는 실제로 속옷만 빼고 다 벗기도 한다. 또 공연 후반부, 오스카가 괴롭힘을 견디지 못해 잠수하게 되는 장면에서는 실제 욕조를 사용한다. 배우의 키보다 살짝 큰 사이즈에 물이 차기 시작하고, 실제로 오스카 역의 배우가 입수한 상태로 장면이 진행된다. 눈속임 없이 그저 정말 대사 그대로 진행되는 장면에 놀라움을 참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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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렛미인> 커튼콜 연극 <렛미인> 출연진들이 공연 종료 후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가운데 손을 잡고 있는 두 사람이 오스카 역의 천우진(왼쪽), 일라이 역의 백승연 배우다. |
| ⓒ 한별 |
첫 만남에서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선언했던 것과 달리 두 사람은 사소한 것들로 가까워진다. 큐브를 풀면서, 젤리를 함께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둘만의 모스부호 신호도 만든다. 그것으로 소통했던 일라이와 오스카의 관계는 '네가 여자애든 남자애든 상관없어'로 발전한다. 그들의 관계가 유의미한 속도로 전개된 것은 하칸이 퇴장하고 나서였다.
일라이의 아빠 내지는 보호자로 보이던 하칸이 연인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공연 종료 후였다. 친구와 감상을 나누다 어딘가 어긋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공연을 보며 한 번도 하칸이 일라이의 연인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째서 인간이면서 일라이에게 저토록 헌신적일까 궁금하긴 했지만, 내가 모르는 사이 일라이의 도움을 받지 않았을까 상상했을 뿐이다.
마지막 장면, 수영장에서의 살인을 끝낸 뒤 오스카는 일라이가 건넨 옷을 입고 일라이가 담긴 박스와 함께 기차에 오른다. 박스 안의 일라이와는 여전히 모스부호로 대화를 하면서 천천히 교감한다.
결말을 보고 머리가 복잡해졌다. 오스카가 일라이를 따라나선 것은 그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때문으로 보인다. 영원한 존재와 나누는 사랑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단단한 것일 테다. 다시는 외롭고 싶지 않은 소년의 마음이라면 상대가 여자애가 아니더라도, 인간이 아닌 피를 마셔야 사는 뱀파이어일지라도 기꺼이 따라나설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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