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에 급히 도망치는 외국인들... 미국 관세 때문에 벌어진 소동극
[박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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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캄보디아 온라인 스캠(신용사기) 범죄단지로 유명한 캄퐁스푸주 소재 일명 '망고 단지'의 썰렁한 최근 모습. 지난 주 현지 경찰의 단지 급습을 앞두고 이곳에서 일하던 수백 여명 외국인들이 대거 탈출했다. |
| ⓒ 박정연 |
텅 빈 '망고 단지', 수상한 침묵 속 '뒷북 단속'
지난 18일(현지시각) 캄보디아 경찰이 수도 프놈펜에서 차로 약 1시간 떨어진 깜퐁스푸주에 위치한 이른바 '망고 단지'를 급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해 보니 이미 단지는 텅 빈 상태였다. 단속한 지 이틀이 지난 시점에 찾아간 망고 단지는 예상보다 훨씬 고요했다. 굳게 닫힌 정문 너머로는 인기척 하나 없이 정적만 감돌았고, 밖에서는 단지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3~4명의 현지 경비원이 철문 앞에서 서성이는 기자에게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단속 이틀 전인 16일 저녁부터 현장 주변은 이미 들끓고 있었다. SNS에선 수백 명, 많게는 천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단지에서 탈출하는 영상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배낭을 메고 급히 도망치는 젊은 외국인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포착됐다.
그로부터 이틀 후인 20일, 우연히 문제의 단지 앞에서 마주친 툭툭(삼륜 택시) 기사는 "2~3일 전부터 안에서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대부분 중국인이었고,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쪽 사람들도 꽤 있었다. 한국인들도 드물게 있었다"라고 증언했다.
이 단지는 인근에 있는 일명 '태자 단지'와 함께 지난해부터 온라인 불법 도박, 가짜 투자 사이트, 피싱 콜센터의 본거지로 의심받아왔다. 정문은 물론 담벼락이 최소 5미터 이상에, 철망까지 설치돼 있고, 감시카메라가 달려 있어 정상적인 탈출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주거 시설, 사무동, 식당, 각종 편의시설과 경비 시설이 복합적으로 배치돼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웠던 곳이다.
특히 약 10층 높이의 이 단지는 한국인들도 감금됐던 곳으로, 지난해 KBS에서도 범죄 실태를 주목한 단지이기도 하다. 국내 방송 직후 당시 <크메르 타임스> 등 현지 언론들은 정부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해 '정상적인 복합사업단지'라며 해명하고, 한국 언론이 왜곡된 보도를 했다고 비난했으나, 그해 10월 25일 급습을 통해 무려 1000여 명을 체포 구금하며 스스로 범죄조직이었음을 인정하는 셈이 됐다.
이번 단속에서도 경찰 진입 당시에는 이미 주요 조직원 상당수가 사라진 뒤였다. 주민들은 '단속 전에 정보가 새어 나가 조직원들이 빠져나간 것' 같다고 증언했다.
이러한 단속은 단지 안의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그 바깥에서 조용히 삶을 이어가던 수많은 현지 주민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출입문이 닫히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면서 단지 주변의 상점, 택시 기사, 잡역부, 식당 종업원 등 수많은 현지 주민들이 생계 위협에 직면하고 있던 것이다.
툭툭 기사는 "오늘 하루 손님이 한 명도 없었어다 평소 같으면 이 근처에서 하루 서너 번은 왔다갔다 하는데, 지금은 툭툭이 설 일조차 없다"라며 경제적 피해를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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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지 경찰의 온라인 스캠 범죄 아지트 급습으로 압수된 컴퓨터와 휴대전화기들. |
| ⓒ 캄보디아 공보부 |
현지에서는 "진짜 핵심은 이미 며칠 전에 빠져나갔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단속 직전 벌어진 대규모 탈출극은 경찰 단속 시기와 언론 보도를 통해 정보가 사전에 새어 나갔음을 시사한다는 것. 이로 인해 경찰의 단속을 두고 '뒷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현장에는 정작 체포 대상자라기보다는 범죄에 이용당한 노동자들만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체포된 인원 대부분은 실제 범죄를 기획하거나 운영한 인물이 아닌, 구조 요청조차 어려운 감금 피해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국제사회의 인신매매 피해자 보호 기준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이처럼 '뒷북 단속'이 반복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1일 북부 몬둘끼리주 온라인 범죄 소굴 급습 때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무려 13개 국적의 외국인 149명이 체포됐는데, 주로 중국계 조직이 운영하는 온라인 범죄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체포된 중국인은 단 1명에 불과했다.
당시 경찰은 현장에서 컴퓨터 541대와 휴대전화 788대를 압수했다. 압수된 컴퓨터와 휴대전화 수가 체포 인원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이는 실제 범죄자의 수가 훨씬 더 많았음이 추측케 했다. 다른 지역 체포 현장도 위 상황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미 단속 정보가 흘러나와 두목급은 미리 도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직 단속이 이뤄지지 않은 곳도 적지 않다. 지난 주 방문한 남부 해안도시 시하누크빌의 한 온라인 사기 범죄 단지 역시 입구는 굳게 닫혀 있었지만, 내부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수시로 들락거리고, 창문에 빨래가 널려 있는 등 여전히 범죄 조직원들이 활동 중인 것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시하누크빌에 거주하는 현지 교민은 "이 단지가 가장 큰 범죄 지역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지 경찰들이 아직 단속도 안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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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캄보디아 현지 경찰의 급습을 앞두고, 온라인 스캠 범죄 소굴로 알려진 ‘망고 단지’에서 외국인들이 짐가방을 든 채 허겁지겁 탈출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 |
| ⓒ MTV TODAY 페이스북 동영상 캡처 |
AP통신 등 해외 언론과 <크메르 타임즈> 등 현지 매체가 잇따라 거의 매일 단속과 체포 소식을 전하고 있지만, 수사를 이유로 우두머리급 핵심 인물들의 명단은 여전히 비공개 상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이미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도주했거나 은신 중일 가능성이 높아, 일각에서는 정부의 단속 의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 정부가 이처럼 '보여주기식 단속'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각에서는 미국과의 외교적 계산이 배경에 있다고 본다. 미국은 오는 8월 1일부터 캄보디아 제품에 36%의 상호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식 통보한 상태다.
이는 캄보디아로서는 산업 기반이 흔들릴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다. 특히 국가 주력 산업인 섬유·봉제·신발 산업이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는데, 이 분야에 종사하는 약 95만 명 중 80%가 여성 노동자다. 관세가 현실화될 경우, 이들 생계가 곧바로 위협받게 되며, 캄보디아 사회 전반에 커다란 충격을 줄 가능성이 높다. 이는 곧 훈 마넷 총리의 리더십에도 직접적인 타격이 될 수 있다.
훈 마넷 정부도 미국의 이번 관세 조치가 단순한 무역 조정이 아닌 정치적 제재에 가깝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웃나라 베트남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20% 관세를 받아 타격이 덜한 것과 달리, 캄보디아는 미국에 내세울 마땅한 무역 카드가 없다. 결국 캄보디아는 미국이 원하는 인권 문제 개선이나 국제 온라인 사기 범죄 단속 강화와 같은 협상 카드를 꺼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국은 지난 수년간 캄보디아를 "사이버 범죄 방치 국가", "현대판 강제 노동의 진원지"로 지목하며 사이버 산업의 문제점을 강하게 비판해 왔다. 현지 전문가들은 훈 마넷 정부가 온라인 사기 범죄 단속을 대미 협상용 메시지로 활용하는 전략을 세운 것으로 봤다. 미국의 관세 부과가 국가 경제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즉, 이번 단속은 국내 치안 문제 해결보다는 외교전 최전선의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평화연구소(USIP)는 캄보디아 내 사이버 사기 산업의 수익이 연간 125억 달러(약 17조 2천억 원)를 초과할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캄보디아 공식 GDP의 절반에 달하는 규모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지난 주에는 경찰이 프놈펜 소재 휴고 보스 짝퉁 제품을 판매하는 매장을 급습해 다량의 증거물들을 압수하기도 했다. 이 또한 미국과의 상호관세협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이는 지적재산권 보호 등 미국이 요구하는 통상 관련 사안에 대한 캄보디아의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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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훈 마넷 정부가 이례적으로 중국인 관련 온라인 스캠 조직에 칼을 빼든 것은 미국에 보내는 강력한 전략적 메시지로 해석된다고 현지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그가 미국을 향해 내민 외교카드가 성공할지 여부는 상호관세가 발효되는 8월 1일 이전에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
| ⓒ 훈 마넷 총리 페이스북 |
시진핑 정권이 들어선 이래 지난 10여 년간 중국과 긴밀히 밀착해온 캄보디아가 대규모 중국인 범죄 조직을 단속하고 핵심 인력을 체포하는 것은 상당한 부담과 위험을 수반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 마넷 정부가 이례적으로 중국인 관련 온라인 사기 범죄 조직에 칼을 빼든 것은 미국에 보내는 강력한 전략적 메시지로 해석된다.
현지 전문가들은 이번 단속을 통해 캄보디아가 "우리는 중국에 무조건적으로 종속되지 않는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미국과도 협력하고 싶다"는 균형 외교의 신호를 보내려는 의도라고 분석한다. 이는 캄보디아가 국제사회, 특히 서방 국가들로부터 '친중 국가'라는 프레임에 갇히는 것을 경계하고, 다자 외교를 통해 국익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적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이번 조치는 미국의 36% 관세 부과를 앞두고 캄보디아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성실성'의 증명인 셈이다. 사이버 범죄 방치국가라는 오명을 벗고 인권 문제 개선에 대한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미국과의 무역 관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중국과의 관계를 냉각시킬 수 있는 위험도 내포하고 있어, 훈 마넷 정부의 줄타기 외교는 앞으로 더욱 복잡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집권 2년차를 맞이한 훈 마넷 총리는 전국 단위의 온라인 범죄 단속을 카드로 꺼내들며, 미국과 벼랑 끝 외교전을 벌이고 있다. 한 손에는 미국의 고율 관세 철회를 이끌어내기 위한 '보여주기식 단속'을, 다른 손에는 중국과의 전략적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복잡한 내부 정치 과제를 쥐고 있는 셈이다.
이번 단속이 단발성 이벤트에 그칠지, 아니면 범죄 카르텔의 근본적 해체와 인권 개혁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그러나 미국은 오는 8월 1일, 예정된 관세 부과를 유예할지 강행할지를 결정하면서, 캄보디아의 진정성과 실효성을 평가할 전망이다. 그날은 훈 마넷의 외교적 도박이 성공했는지가 가늠되는 분수령이 될 것이며, 캄보디아가 '온라인 사기 범죄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씻을 수 있을지 여부도 함께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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