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과·약밥의 유래…가문 일으킨 시각장애 어머니 손맛이었다

명필 한석봉의 일화를 기억하시는지. 등잔불을 끈 채 떡장수 어머니는 떡을 썰고 아들은 붓글씨를 쓰게 한 이야기. 홀어머니는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허구한 날 떡판을 이고 장터로 나갔었다.
경북 안동에도 홀어머니 이야기가 전해온다. 안동의 어머니는 등잔불을 끌 필요도 없었다.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남편을 일찍 여읜 그녀는 외아들 키우려고 음식을 만들고 술을 빚어 팔았다. 그게, 지금 우리가 아는 ‘약과’와 ‘약밥’ 그리고 ‘약주’가 됐다.
어머니 이름은 전해오지 않지만, 그렇게 키운 아들의 이름은 기록에 남았다. 약봉(藥峯) 서성(1558~1631). 형조판서·병조판서·대사헌 등을 지낸 조선 중기 문신으로, 대구 서씨 가문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약봉의 자손도 번성했다. 약봉 이후 정승만 6명을 배출하는 등 대구 서씨 집안은 조선 후기 명문가를 이뤘다.
약봉이 태어난 자리가 안동시 일직면의 ‘소호헌(蘇湖軒)’이다. 소호헌은 1968년 보물로 지정된 유서 깊은 유산이다. 500년 묵은 이 목조 건물에 앞 못 보는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이 배어 있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소호헌과 임청각

1515년 임청각을 건립한 인물이 이명이다. 그 이명의 다섯째 아들 이고의 딸이 함재와 결혼했다. 이고가 사위에게 준 선물이 소호헌이다. 원래는 자신의 서재로 건립했으나 안동으로 들어온 사위에게 살라고 내줬다.
소호헌은 크게 두 건축물로 구성된다. 보물로 지정된 누정 한 채와 약봉이 태어난 내당 한 채다. 전통 건축에 문외한이어도 소호헌은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화려한 팔작 기와 아래 여덟 칸 마루와 두 칸 온돌방을 연결했는데, 누정이 뿜어내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이고가 제 서재를 사위에 내준 사정이 있다. 이고의 딸은 시각 장애인이었다. 함재는 안동에 도착하기 전에도 신부가 앞을 못 본다는 걸 알았으나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둘은 혼인하여 아들 한 명을 낳았다. 그 아들이 약봉이다. 함재는 혼인한 지 5년 만인 1559년 23세를 일기로 요절했다. 약봉이 생후 1년 6개월이었을 때다.
어머니의 약밥

이씨 부인은 음식 솜씨가 빼어났다. 그 솜씨로 그는 찰밥과 유밀과를 만들었고, 아들이 서당에 갈 때마다 넉넉히 싸줬다. 앞 못 보는 어머니가 싸준 찰밥과 유밀과로 약봉은 서당 생활을 무탈하게 보냈다. 이씨 부인은 생계를 위해 청주도 빚어 내다 팔았다. 그 시절 안동 여자는 누구라도 술을 빚을 줄 알았다. 제사마다 집에서 빚은 청주를 썼기 때문이다. 이씨 부인이 내다 판 음식은 이내 장안의 화제가 됐다. 요즘 말로 ‘핫템’이 된 것이다. 조정 대신이 이씨 부인의 청주를 임금에 진상했더니 임금이 “천하의 진미”라고 감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이씨 부인이 만든 음식과 술은 모두 앞에 ‘약(藥)’ 자가 붙었다. 이씨 부인이 밤·잣·호두 등을 넣고 지은 찰밥은 ‘약밥’이 됐고, 유밀과는 ‘약과’가 됐고, 이씨 부인이 빚은 청주는 ‘약주’로 불렸다. 약봉의 어머니가 만들어 ‘약’ 자가 붙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약봉 어머니가 살던 곳이 약현동이어서 ‘약’ 자를 따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안동 문화유산 활용을 위한 민간단체 ‘세계유산콘텐츠센터’의 권두현 이사는 “500년 가까이 된 이씨 부인의 일화 말고 약밥·약과·약주의 유래에 관한 다른 이야기는 전해오지 않는다”며 “약봉의 어머니를 ‘약밥 어머니’로 불러도 될 듯하다”고 말했다.
소호헌 체험

세계유산콘텐츠센터는 다음 달부터 소호헌 만찬 음악회를 정기적으로 열 예정이다. 소호헌 만찬 음악회만으로는 프로그램이 모자란 듯싶어 안동 곳곳의 문화유산 체험 프로그램과 결합했다. 패키지여행은 아니고 이른바 ‘집결지 여행’이다. 각자 정해진 장소를 정해진 시간에 맞춰 가서 현장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프로그램은 다양하다. 우선 ‘민속주 안동소주 전승관’ 체험 프로그램. 안동소주는 현재 허가받은 9개 양조장만 빚을 수 있다. 이 중에서 ‘민속주 안동소주’는 안동 음식의 대가 조옥화(1922~2020) 명인의 아들 내외가 물려받아 운영하는 곳이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안동을 방문했을 때 생일상을 차렸던 주인공이 조옥화 명인이다. 그때 차렸던 ‘여왕 생일상’이 전승관에 재현해놨다. 이외에 만휴정과 묵계서원에서는 시드볼 만들기, 향낭 만들기, 활인체조 체험 등을 할 수 있다. 봉정사 해설 탐방, 하회마을 선유줄불놀이 관람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처음에는 소규모 단체 중심으로 운영할 계획으로 인원과 일정은 세계유산콘텐츠센터와 상담하면 된다.
권두현 이사는 “안동 하면 하회마을과 도산서원만 떠오르지만, 가치와 의미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문화유산이 여전히 많다”며 “덜 알려진 문화유산이 많다는 건 알려야 할 이야기가 많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안동=글ㆍ사진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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