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살해하고 범행 덮은 남자, 이 영화의 '삐딱함'에 빠져든다

김성호 2025. 7. 23.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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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1113] <미세리코르디아>

김성호 평론가

퀴어(Queer)의 변천이 재미있다. 오늘날 퀴어는 게이며 레즈비언, 양성애자와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 일반을 포괄해 가리키는 말이다. 퀴어를 소재로 한 영화를 퀴어영화, 문학을 퀴어문학이라 부르는 등 멸칭이 아닌 객관적 용어이고, 이따금은 응원의 문구처럼도 여겨질 정도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퀴어는 고대 영어에선 비스듬하거나 삐딱한 걸 뜻하는 단어였다. 형태적 비스듬함이 이내 이상하거나 특이하다는 형용사적 쓰임을 얻었고, 괴짜며 꺼림칙히다는 부정적 의미로까지 나아갔다. 시간이 흐르며 이와 같은 쓰임이 특정한 이들을 향한 건 우연일 뿐일까.

성소수자는 문화권을 막론하고 인류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정신병이며 범죄로까지 치부됐다. 고대 그리스 정도를 제외하곤 전통적 성규범에서 어긋나는 개인의 존재 자체가 금기시됐다. 이에 대한 폭력이 합리화된 사례 또한 수두룩하다. 특히나 인간이 신의 피조물로서 그 자체로 완결무결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기독교 창조론에 입각한 질서 아래선 성소수자는 잘못된 것이고 고쳐야 할 것이었다. 19세기 기독교 사회에서 성소수자를 싸잡아 퀴어라 비하한 것은 그 같은 흐름의 결과였다.
▲ 미세리코르디아 스틸컷
ⓒ M&M 인터내셔널
이보다 퀴어적일 수 있을까!

흥미로운 건 성소수자 사회가 퀴어라는 단어를 껴안았다는 점일 테다. 가까이 보면 서로 다른 성소수자 일반을 포괄해 부를 만한 개념이 필요하던 터였다. 단어 자체가 성소수자를 향한 손가락질이었으나 성소수자와 그 우호집단이 이를 포용한 이상, 멸칭적 쓰임은 상당부분 소실됐다. 특이하고 괴상함을 인정하는 대신 그것이 차별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선언, 그것이 퀴어가 문화로 선 시작점이었다.

말하자면 퀴어는 특이한 것이다. 낯설고 삐딱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 또한 인간이며 인간의 본래적이고 본질적인 특성을 그대로 갖는 존재들이다. 사랑과 우정, 열망과 희망, 욕구와 충동, 우울과 분노 모두가 퀴어와 그렇지 않은 인간 모두에게 자리한다. 잘 만든 퀴어예술은 이를 일깨운다. 특이함과 낯섦으로부터 보편적 감상을 이끌어낸다. 그로부터 우리 자신을 새로운 눈으로 돌아보도록 한다.

이달 개봉한 <미세리코르디아>가 꼭 그런 영화가 아닌가 생각한다. 가장 퀴어적인 작품, 인간을 이해하는 기괴한 시각을 드러내는 영화라는 뜻이겠다. 영화엔 우정과 사랑, 욕망과 분노가 뭉뚱그려져 등장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다른 작품에선 마주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비춰진다. 그저 성별과 나이, 직업 따위의 흔한 특징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인간과 관계의 면면을 이 영화가 내보인다.
▲ 미세리코르디아 스틸컷
ⓒ M&M 인터내셔널
친구를 살해하고 범행을 덮는 남자

주인공은 제레미(펠릭스 키실 분), 특별할 것 없는 청년이다. 그는 오래 전 자신이 일했던 빵집의 주인이 죽고 그 장례식에 참석 차 고향으로 돌아온다. 빵집 주인장의 아내 마르틴(카트린 프로 분)의 청으로 제레미는 그녀의 집에 며칠 더 머물기로 하는데, 이를 그집 아들이자 옛 친구 뱅상(장-밥티스트 듀란트 분)이 못마땅하게 여긴다.

영화는 일순간 범죄물로 화한다. 제레미에게 시비를 걸고 그를 내쫓으려 하던 뱅상, 또 다른 옛 친구 왈테르와의 관계가 점차 격화되더니 어느 순간 되돌릴 수 없는 사건이 빚어지는 것이다. 저보다 체격도 크고 힘도 좋은 뱅상과 싸움이 붙은 제레미가 실수로 그를 살해하고 만 것이다. 황급히 그를 인적 드문 숲에 매장한 제레미, 그러나 그 마음이 어떻게 편할 수가 있으랴. 뱅상이 사라지고 그를 찾는 집주인 마르틴과 이웃들, 또 어디서 낌새를 챈 것인지 살인을 의심하며 수사에 나선 경찰들까지, 제레미는 점차 구석으로 밀려가는 것이다.

외연을 보자면 <미세리코르디아>는 전형적 범죄물처럼 보인다. 우연이라고는 하지만 살인을 저지르고 그를 감추어야 하는 이야기가 영화의 줄기를 이루는 때문이다. 경찰수사와 이를 회피하려는 용의자의 물고 물리는 겨루기가 여느 범죄물 못지 않다.
▲ 미세리코르디아 스틸컷
ⓒ M&M 인터내셔널
흔한 클리셰, 여기엔 없다

그러나 영화는 범죄물의 외연만 가졌을 뿐, 인간 본연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드라마이며 우리를 객관적으로 돌아보도록 하는 블랙코미디의 성격을 보다 진하게 드러낸다. 마르틴은 어째서 제레미를 머물도록 하는가, 뱅상은 또 왜 그를 싫어하는가, 제레미는 그 모두를 알면서도 왜 상황을 개선하려 하지 않는가, 이들을 둘러싼 경찰과 신부, 또 다른 이들의 선택은 어떤 이유로 빚어지는 것인가. <미세리코르디아>가 그 의문을 하나하나 풀어갈 때, 관객은 이들을 추동하는 동력이 우리 안에도 얼마 다르지 않은 형태로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할리우드에서 같은 사건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면, 파헤치는 경찰과 벗어나려는 용의자, 이들을 둘러싼 마을의 음모 따위가 보다 부각되는 작품이 되었을 테다. 그러나 영화는 그 모두를 상황을 극화하는 장치로써만 활용할 뿐, 각자의 이유며 선택, 그 근저에 깔린 감정에 보다 집중해나가는 것이다. 경찰은 결코 질서의 수호자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용의자 또한 대단한 악당이 아니다. 제레미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손을 내미는 신부는 정작 성직자로 보자면 결격사유가 분명하다. 심지어 살인을 둘러싼 뱅상과 제레미의 감정싸움과 그 진상은 어떠한가. 영화는 관객의 통상적 기대를 깨는 너무도 인간적인 면모를 통하여 영화를 흔한 선과 악의 대립, 범인과 경찰의 싸움으로 놓아두지 않는다.
▲ 미세리코르디아 포스터
ⓒ M&M 인터내셔널
자비만 있다면, 자비만 갖는다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미세리코르디아'는 라틴어로 자비란 뜻이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그 중요성이 드러나는 것은, 영화 속 모든 인물들, 캐릭터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인 때문이다. 관객이 자비를 갖고 바라보기만 한다면 살인이 일어나고 그를 덮는 영화 속 이야기가 그대로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이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건이 된다. 이 안에도 사랑과 우정, 애정과 열망 따위가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비가 없다면 이곳은 위선과 증오, 폭력과 비겁으로 가득한 장이 된다. 같은 일이 벌어진 한 마을을 전혀 달리 바라보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미세리코르디아, 곧 자비인 것이다. 영화를 감독한 알랭 기로디는 "죄책감과 후회, 용서, 인간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또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를 묻고, 도덕규범을 흔들어보고 싶었다"고 연출의 의도를 밝힌 바 있다.

이 영화가 과연 그러하여서, 관객은 이 시대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지극한 범죄로 여겨지는 살인에도 불구하고 그를 덮으려는 인간들을 쉬이 판단할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도덕규범을 흔들어 규칙 그 자체가 아닌, 그것이 감싸고 있는 우리 본연의 인간다움을 확인케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 <미세리코르디아>의 미덕일 테다.

앞서 이 영화를 가리켜 퀴어적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이라 적었다. 기묘하고 요상한 것, 그러나 그대로 인간적인 것, 퀴어가 괴상함이 누구에게나 있어 차라리 일반적이고 인간적이란 사실을 확인토록 한다면 이 영화는 그대로 퀴어적 영화라 해도 좋겠다. 나는 <미세리코르디아>보다 더 퀴어적인 작품을 얼마 알지 못한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영화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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