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죽음 추적하는 소년... 한국인이 반드시 알아야 할 이야기

김성호 2025. 7. 2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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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1112] 제22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 국제경쟁 대상 <평화를 찾아서>

[김성호 평론가]

영화제를 찾아 내걸린 작품을 보고 소개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태반이, 특히 내가 관심을 갖고 소개하는 작품의 경우는 대부분이 한국 관객이 자의든 타의든 닿을 일 없는 영화일 것이다. 구태여 그를 보고 글로써 다시 전하는 일이 갖는 가치를 이 자리에서 새겨보기로 한다.

영화평론가로 살다 보면 만남을 청해오는 영화계 관계자며 영화팬들과 자리를 갖게 될 때가 많다. 한국영화계를 지극히 걱정하는 이들은 한목소리로 한국 대중이 수용하는 폭이 너무나 작고 좁다는 사실에 우려를 표한다. 말인즉슨, 전 세계에서 제작되는 수많은 작품군 가운데서 한국 극장에 내걸리는 영화가 지극히 일부라는 이야기다. 여기엔 관객과 업자, 또 제도며 환경의 탓이 뭉뚱그려져 있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먹힐 만한 영화만 들여오기 때문이겠다.

사정이 열악하기 짝이 없는 영화사는 한국에서 장사가 되지 않을 작품에 구태여 시간과 비용을 투입하지 않는다. 제작한 국가와 감독, 배우, 장르, 간단한 설정까지만 보고도 한국에서 대략 몇 명쯤이 들겠다는 이들의 판단이 크게 벗어나지 않는단 걸 나는 지난 수년간의 경험으로 깨달았다. 역전의 가능성이 있는 영화는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고, 그 역전의 씨앗조차 즉석복권 당첨처럼 좀처럼 현실화되지 않는다. 그나마도 일말의 흥행 가능성을 지닌 작품은 손에 꼽게 마련이다. 대부분은 도무지 가망이 없다는 이야기다.
▲ 평화를 찾아서 스틸컷
ⓒ 서울국제환경영화제
2025년 한국인이 반드시 알아야 할 이야기

오늘 소개할 <평화를 찾아서>도 그런 작품이다. 한국 극장가에 걸린다면 채 몇 천 명이 들지 않으리란 이야기다. 박정민이 넷플릭스보다 재밌다고 평을 써준다거나, 장원영이 TV에 나와 요즘 재밌게 본 영화라 소개해준다면 또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일은 거스 히딩크의 4강 신화처럼 지극히 드물게 일어나는 것이다. 요컨대 <평화를 찾아서>는 한국에서 볼 일 없는, 또 볼 수도 없는 영화가 되기 십상이다.

나는 이를 몹시 못마땅해 한다. 그건 제22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 대상 수상작인 이 영화가 드물게 뛰어난 작품이기 때문이요, 이 시대 한국에서 도저히 접하기 어려운 희소한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기후위기로 멸절이 코앞에 닥친 지구인으로서의 의무며 책임을 돌아보도록 하는 작품이기 때문이고, 기후위기에 한몫을 단단히 한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 선정 '오늘의 화석상'의 주인공인 한국에 남달리 다가올 영화이기 때문이다. <평화를 찾아서>는 기후위기가 이 시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더없이 유효한 작품이란 점에서 오늘의 한국인에게 필감작이 되어야 마땅한 작품이다.

영화는 다큐멘터리다. 작품을 보는 내내 나는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를 표방한 페이크 다큐, 즉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건 이 영화가 너무나 자극적인 소재를 담고 있기 때문이고, 주인공인 소년이 또한 믿기 힘들 만큼 담담한 자세를 견지하는 때문이었다. 영화는 그 시작을 케냐에 사는 소년이 집 앞 공터에서 찍은 홈비디오로 여는데, 그는 제 아버지가 총에 맞아 죽었고 저는 그 사연을 추적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저는 울고 있지 않다고도 이야기한다.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 평화를 찾아서 스틸컷
ⓒ 서울국제환경영화제
아버지의 죽음 추적하는 열세 살 소년

한국으로 치자면 이제 겨우 중학생쯤 되었을까. 열세 살 소년 시몬 알리는 장래희망으로 기자를 지망했다 했다. 처음 기자를 지망했을 적 그가 취재하고팠던 이야기는 아마도 영화 속 그가 파고드는 것과는 다른 모양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는 제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소년의 아버지는 평범한 케냐 유목민 부족 남성이었다. 케냐에선 수백에서 수천 명 단위의 여러 부족이 짐승을 몰고 초원을 옮겨 다니며 삶을 꾸려온 역사가 길었다. 그래봐야 산업이 자리 잡지 못한 케냐의 경제상황에서 자식을 도시로 보내지도 못하고 기초교육이나 시키는 정도일 뿐이지만 말이다.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 건 우연한 일이었다. 케냐 중부의 라이키피아 자연 보호구역 연합(Laikipia Nature Conservancy Association) 내 24개 보호구역 중 하나인 라이키피아 자연 보호구역(Laikipia Nature Conservancy) 직원으로 발탁된 것이다.

단일 보호구역만도 서울 면적의 절반이 훌쩍 넘는 규모의 방대한 땅엔 코끼리, 치타를 비롯한 수많은 동식물이 살아가고 있다. 이 땅의 소유주는 이탈리아계 갈만 가문이다. 쿠키 갈만과 그녀의 딸 스베바 갈만이 케냐로 이주해 보호구역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케냐가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독립을 맞이할 즈음, 영국이 유럽 자산가들에게 땅을 팔아치웠다고 했다. 이때 이 방대한 토지가 갈만 가문에게 돌아갔고, 작가이자 환경운동가이기도 한 쿠키가 땅을 자연보호구역으로 바꾸고 불법수렵과 삼림파괴에 맞서 반세기 동안 지켜왔던 것이다. 현지에서 믿을 만한 이들을 고용해 무장시키고,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을 통해 수입을 올려 비용을 충당하는 사업도 벌였다.

사이먼을 비롯해 다섯 아이의 아버지인 스티븐 알리 아페텟(Stephen Ali Apetet)은 그중에서도 신뢰받는 이였다. 주변에 호감을 사는 인품 덕에 가이드로도 활약했던 스티븐은 갈만 가문 밑에서 일하며 자식들에게 현대적 교육을 받도록 하는 사실에 만족하며 살았다. 만약 변화가 없었다면 그의 운명도 달라졌을 테다.
▲ 평화를 찾아서 스틸컷
ⓒ 서울국제환경영화제
총 맞아 죽은 가이드, 누가 그를 쏘았을까?

<평화를 찾아서>는 소년 시몬이 아버지 스티븐의 죽음을 파헤치는 여정을 뒤따른다. 스티븐은 평소처럼 보호구역 내에서 관광객들을 안내하던 중 총에 맞아 숨졌다고 했다. 무장한 직원과 운전기사, 관광객들이 함께 있었지만 경찰에 스티븐의 죽음에 대한 증언을 해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스티븐은 동료 직원들을 하나하나 만나며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을 파악해나가기 시작한다. 우선 아버지와 친했던 운전기사를 찾아 무장요원이 총격이 벌어지자 종적을 감췄다는 사실을 파악한다.

세계적 명성을 가진 해양보호 운동가 니콜 고믈리와 케냐 영화감독이자 제작자 데브라 아로코가 공동으로 연출한 다큐는 소년 시몬이 아버지의 죽음을 파헤치는 과정으로부터 그 죽음 아래 깔린 복잡한 상황을 차츰 드러낸다. 라이키피아 자연 보호구역은 지난 십수 년간 인근 부족들과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목축을 업으로 삼는 케냐 전통 유목부족들이 가축을 먹일 풀과 물을 찾아 보호구역의 경계를 넘나든 때문이다. 수십 년 전엔 밀렵에 대한 방비가 전부였으나 소수 밀렵꾼이 아닌 부족 일반이 경계를 넘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엔 충돌이 극렬했는데, 소총으로 무장한 부족민 수백에서 수천이 한번에 경계를 넘고 직원들을 향해 발포까지 했다는 이야기다. 어렵사리 만난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이, 당시 관광 중이던 이의 증언에 따르면 이동 중이던 일행도 부족민으로 의심되는 이들로부터 기습을 당했다고 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복부 총상을 입은 스티븐은 고통스럽게 죽었다 했다. 대체 왜? 무엇이 부족민으로 하여금 이토록 악착같이 경계를 넘도록 하는가. 동족을 향해 발포하도록 하는가.

영화가 그 진실에 다가서는 과정이 아프다. 소년이, 죽은 스티븐의 아내와 자식들이 마주하는 진상은 너무나 뼈아파서 목도하기가 힘이 들다. 경계를 넘는 이들은 또 다른 죽음과 대면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케나 전역이 극심한 가뭄에 시달렸다. 풀은 모두 사라지고 들판은 황무지가 됐다. 갈만 가문이 공들여 지켜온 라이키피아 보호구역 같은 숲만이 보존되고 있을 뿐이다. 수 세대에 걸쳐 목축을 업으로 삼아왔고, 삶을 꾸려갈 다른 방도가 없는 이들은 총을 구해 경계를 넘는다. 그 과정에서 보호구역 무장 요원에게 사살된 이들 또한 적지 않다.

충돌은 그렇게 반복돼 왔다. 해가 갈수록 심해지는 가뭄은 가축들을 하나둘 죽도록 했다. 그를 살리는 것이 저 자신을, 아내를, 자식을 살리는 일이기도 했다. 부족민들이 목숨을 걸고 경계를 넘어야 했던 이유다. 부족민 출신인 스티븐이 이를 중재하고자 했으나 해낼 수 없단 걸 그조차 짐작하고 있었던 듯하다. 시몬만 학업을 마치면... 하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는 아들이 고작 13살 때 총에 맞아 죽었다. 동료들은 도망치고 고작 두 번 만난 백인 관광객이 보는 앞에서 고통 속에 몸부림치면서 죽어갔다 했다.
▲ 서울국제환경영화제 포스터
ⓒ 서울국제환경영화제
총구 앞에서 평화를 외쳤다

처음 부족민들이 일어서 총을 겨누었을 때 스티븐이 가장 먼저 알아챘다고 했다. 그가 갑자기 손을 들더니 "아마니" 하고 외쳤다고 했다. 아마니는 스와힐리어로 '평화 peace'를 뜻한다고 했다. 그러나 평화는 없었다. 죽음만이 있었을 뿐이다.

<평화를 찾아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니'를 찾는 이들의 이야기다. 스티븐의 아내와 자식들은 진상을 알게 되고 문제를 이해한다. 부족민들이 경계를 넘은 이유를 깨닫고 책임을 묻지 않고자 한다. 그들이 강을 건넌 이유가 스티븐이 끝내 가이드를 포기하지 못한 이유와 같음을 알아서다. 케냐의 혹독한 가뭄이 끝나지 않는 한, 갈수록 심해지는 더위가 그치지 않는 한 문제는 반복되리라고 여긴다. 기후위기, 지난 수백 년 서구문명의 번영을 이끈 화석연료 시대의 결과가 범인이라 확인한다. 아마니, 복수가 아닌 평화가 스티븐과 시몬의 가족이 내린 결정이다. 그러나 그 평화는 지속될 수 있을까.

누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경계를 넘는 부족을 막는 갈만 가문을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살기 위해, 가축을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모험을 감행하는 부족민들은 잘못되었다 할 수 있을까. 대체 누가 죄인인가. 평화를 찾는 영화는 그 평화를 해하는 범인을 마침내 지목한다. 그 손가락 끝에 선 것은 누구인가.

<평화를 찾아서>는 말한다. 기후위기로 극심한 피해를 보는 이들은 그에 책임 있는 이들이 아니라고. 시몬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편히 앉아 영화를 보고 있던 내가 있음을 깨닫는 건 괴로운 일이다. 오로지 돈이 되기에,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다는 이유로 기후위기 대응을 가장 늦춘 국가,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 선정 '오늘의 화석상' 수상자, 환경운동가들에게 '기후악당'이라 불리는 이 나라 한국이 범인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영화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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