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혜 시인 "사랑과 멸종, 두 단어로 삶을 견디죠"

지난해 10월 출간된 유선혜(28) 작가의 첫번째 시집,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의 표제작은 이렇게 시작한다. “공룡은 운석 충돌로 사랑했다고 추정된다/현재 사랑이 임박한 생물은 5백 종이 넘는다/우리 모두 사랑 위기종을 보호합시다”
단순히 ‘멸종’을 쓸 자리에 ‘사랑’을 끼워 넣은 걸까? 그랬다면 그의 시집이 출간 9개월 만에 9쇄를 찍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인은 마지막 연에 다다를 때 이렇게 고백한다. “멸종해, 너를 멸종해” 그즈음 독자는 알 수 있다. 유선혜는 ‘멸종’을 ‘사랑’만큼 의지하는구나.
“멸종은 멀리 보면 인간의 미래이기도 하다. 전엔 끝이 있다는 것이 모든 일을 허무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렇기에 모든 일이 중요해진다고 생각한다.” 지난 18일, 중앙일보에서 만난 유 작가는 두 단어를 바꿔 놓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모든 것이 소중하지만 동시에 허무한 느낌. 사랑과 멸종 모두 그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봤다.”
그는 시집에 실린 조연정 문학평론가의 해석에 마음이 동했다고 한다. 조 평론가는 유 작가의 시에 대해 “멸종을 눈앞에 둔 마음으로 ‘슬픈 동물’처럼 사랑하는 ‘우리’가 함께 손을 잡고 계속 다음을 향해 걸어보자는 ‘우리’이기도 할 때, 미래의 고통은 오늘의 기쁨으로 견뎌질 수 있을 것”이라고 평했다. 덕분에 유 작가는 “사랑과 멸종이라는 두 단어는, 우리가 삶을 견디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밝고 쨍한 표지 색과는 달리, 당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 여성의 감각과 불안 등 어두운 감정을 섬세하게 담아냈다. 이에 공감한 젊은 독자들이 그의 시집을 찾았다. 예스24에 따르면, 『사랑과 멸종을…』 구매자 중 2030 여성의 비율은 59.4%에 달한다. 출간 직후 5개월간 시·희곡 부문의 베스트셀러 10~20위권을 유지하다 서울국제도서전 이후인 7월엔 6위까지 반등했다.

그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 같은 대학 국문과 대학원을 마치고 현재는 석사 졸업논문을 준비 중이다. 2022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첫 시집 『사랑과 멸종을…』은 스무살 때부터 스물 여섯살까지 쓴 시를 모은 결과물이다.

Q : 글은 어떻게 쓰게 됐나.
A : “어릴적부터 쓰기와 읽기는 내 삶의 본질적인 요소였다. 학부 때 시 읽기 동아리를 들어가며 본격적으로 시를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취미로 써 온 시를 투고했다가 예상치 못하게 등단한 것이다.”
Q : 철학이 소재가 된 시가 눈에 띈다.
A : “철학자들의 주장이 하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철학에 관해 내가 쓴 시들은 그런 상상에서 출발한 사고실험의 결과다. 철학자가 되고 싶었던 적도 있지만, 그 분야에서 내가 무언갈 만들어내기는 어렵더라. 문학을 생산하는 일은 오히려 더 잘 맞는다고 느낀다.”
Q : 어떨 때 시를 쓰나.
A : “문득 영감이 떠오르는 편은 아니다. 대부분은 ‘두 단어만 바뀐 쌍둥이 지구가 있다면 어떨까?’ 이런 작은 상상들에서 출발한다. 상상이 머릿속 한 장면으로 정리되면 그걸 시로 다듬어 쓴다. 그러다 보면 내가 생각지 않았던 곳으로 멀리멀리 가기도 하는데, 그 순간이 즐겁다.”
Q : 시에서 보면 ‘우울하다’는 대학생 화자에게 ‘시를 읽지 말라’고 조언하는 교수가 나온다. ‘시 쓰기’를 현실과 동떨어진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A : “직접 들은 말을 기반으로 쓴 시다. 하지만 내 삶에서 글쓰기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직장에 다닌 적도 있는데, 당시엔 돈을 벌고 바쁘게 지냈지만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일할 때 으레 그렇듯, 글을 쓰려면 잡다하고 자질구레한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결과물은 아름다울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현실적이다.”
Q : 좋아하는 시인은?
A : “최승자, 기형도, 김중식 시인이다. 현재 드러나고 있는 청년의 절망은 미시적인데, 과거에 드러난 청년들의 절망은 사이즈가 다른 것 같다. 분명 지금의 청년들도 실존의 비극 등 당대와 비슷한 고민을 안고있을텐데,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이야기들을 더 꺼내 놓고 싶다."
Q : 앞으로는 어떤 글을 쓰고 싶나.
A : “몸이 기능하는 한 쓰기와 읽기를 계속하고 싶다. 시 외의 다양한 장르도 시도해보고 싶다. 12.3 비상계엄 이후에 낸 에세이 앤솔러지 『다시 만날 세계에서』에 참여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지금 필요한 책이고, 그 책에 글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11월에 새로운 시집 출간을 앞두고 있다. 『사랑과 멸종을…』에도 자주 등장하는 ‘방’에 대한 시들을 적어봤다.”
최혜리 기자 choi.hyer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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