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면 먹던 부산 남자의 평양냉면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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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호 기자]
밀면으로 여름을 버티고 돼지국밥으로 겨울을 이겨낸 부산 토박이 아저씨가, 지금은 서울 평양냉면 맛집을 찾아 일주일에 두세 번씩 출근 도장을 찍습니다. 점심시간 30분쯤 줄 서는 일은 오히려 식도락을 위한 당연한 통과의례처럼 느껴지고, 새로 뜬다는 평냉 맛집 소식을 들으면, 아무리 멀어도 한 번은 꼭 가봅니다. 이쯤이면 저도 인정합니다. 저는 냉면에 중독됐습니다.
예전엔 이해하지 못했던 음식입니다. 처음엔 딱히 입에 감기는 맛도 없었고, 국물은 맹맹하고, 면은 툭툭 끊어졌습니다. '걸레 빤 물'이란 표현, 진심 공감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맛이 자꾸 생각났습니다.
강하게 끌리진 않는데 오래 남는 맛. 말수는 적지만 곁에 있으면 안심이 되는 친구처럼, 그 한 그릇은 묘하게 마음에 남았습니다. 몇 번이고 다시 마주하다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이건 혀로만 먹는 음식이 아니구나. 이건 기억과 취향과 시선을 천천히 길들이는 '입맛의 의식'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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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양냉면. |
| ⓒ 문현호 |
SNS에는 평냉 인증 사진이 넘쳐나고, 봉피양이든 필동면옥이든, 냉면 그릇 위에 각자의 철학이 담깁니다. 먹는 방식도 다양합니다.
"식초 넣지 마세요. 겨자도 NO."
"아니, 개인 취향입니다. 넣을 수도 있죠."
"면은 자르면 안 돼요."
"전 잘라야 더 먹기 좋아요."
이쯤 되면 그냥 한 그릇 국수가 아니라, 각자의 '미식 신념'이 얹힌 한 판 철학 싸움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논쟁이 귀엽습니다. 음식 하나를 두고 이토록 열띤 토론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사회가 이 음식에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 아닐까요?
그리고 그런 열띤 논쟁의 한복판에서, 저는 차라리 육수를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시겠습니다. 육향이 은근히 올라오고, 입 안에서 사라지며 감칠맛이 남습니다. 그 고요한 여운이 저는 참 좋습니다. 어느 날은 우래옥의 묵직한 육수에 반하고, 또 다른 날은 을지면옥의 슴슴한 투명함이 좋습니다.
그날의 기분과 날씨, 배고픔의 정도, 동행인의 말투 같은 것들이 그날의 평냉을 결정합니다. 그렇게 매번 다른 맛을 만나면서, 저는 냉면이 단지 음식이 아니라 하루의 기억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는 걸 배웠습니다.
찬제육이 함께라면 이야기는 또 달라집니다. 쫀득하게 식은 제육 한 점을 양념장에 살짝 찍어 먹으면, 입 안에서 온도와 식감, 고기기름과 매콤한 양념이 절묘하게 교차합니다. 그 한 점이 면발보다 더 평양냉면의 깊이를 더해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 소주 한 잔이 놓이면? 말해 뭐 합니까. 그건 환상의 마리아주입니다. 말없이 목 넘기는 한 잔이,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죠.
'아, 오늘 평냉 참 좋네.'
그렇게 자꾸만 평냉에 마음이 간 이유를 곱씹다 보면, 문득, 이 음식의 묘한 시간감을 떠올리게 됩니다. 언제부턴가 여름 별미처럼 여겨졌지만, 평양냉면은 본래 겨울 음식이었다고 하죠. 차가운 냉면을 뜨끈한 온돌방에서 먹던 '이한치한'의 지혜. 술 한잔 후에 속을 달래는 '선주후면'의 문화.
그 오래된 풍경들이 겹쳐지면, 지금 이 한 그릇이 단지 오늘의 점심이 아니라, 시간을 건너온 어떤 위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금은 바쁜 점심 피크타임 한복판에 있지만, 그 속에서도 이 음식은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온도 없이 마음을 데우는 음식도 있다는 게.
온도 없이 마음을 데우는 음식
사람들은 종종 묻습니다.
"그렇게까지 줄 서서 먹을 일이야?"
저는 웃으며 말합니다.
"네. 이건 국수가 아니라 철학이에요."
그 철학이 때론 슴슴하고, 때론 묵직하며, 어떤 날엔 너무 조용해서 잘 느껴지지 않지만, 그날따라 마음이 복잡할 때, 그 조용함이 나를 조금씩 정돈해 줍니다.
그러니, 저는 오늘도 평냉을 먹습니다. 그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면 입 안에는 미묘한 감칠맛이 남고, 마음 한켠엔 알 수 없는 평화가 깃듭니다. 그건 음식이 주는 가장 정직한 위로입니다. 처음엔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쯤 먹다 보면 슬며시 빠져들게 됩니다. 어느 날은 누군가에게 "이 집 육수, 오늘 컨디션 좋아요"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아마, 당신도 저처럼 평냉 덕후의 길에 들어서게 된 걸 겁니다. 그럼 우리, 어느 평냉 노포 앞에서 조용히 줄 서 있다가 마주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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