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부를 때 언제든 나섰던 '진정한 용기의 별' 김병곤
[권형택]
김병곤은 1953년 2월 24일, 경상남도 김해군 이북면 퇴래리에서 아버지 김한영과 어머니 송차희의 1남 4녀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한영 선생은 김해 김씨 중에서도 선비 가문으로 유명한 서강파의 종손이었다. 이북면 면장을 오래 지내서 면장을 그만둔 뒤에도 동네에서는 '김 면장'으로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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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고 재학 시절의 김병곤 |
| ⓒ (사)김병곤박문숙기념사업회 |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공부를 잘했던 김병곤은 중학교 때부터 부산으로 나가 개성중학교와 부산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공부 잘하고 학도호국단 대대장을 맡는 등 학교 일에도 열성적인 평범한 모범생이었다. 덩치가 크고 공부도 잘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단연 대장 노릇을 했지만 그러나 자기보다 떨어지는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고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 집안에서는 부모님에게 어른스럽고 든든한 아들이었고, 누나들의 고민을 들어줄 수 있는 믿음직한 동생이었으며, 누이동생에게는 언제나 기댈 수 있고 뒤에 숨을 수 있는 큰 나무 같은 오빠였다.
김병곤이 사회현실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도산연구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국어선생이면서 부산 지역의 유명한 시인 김태홍(호 살매) 선생도 김병곤의 의식이 성장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살매 선생이 즐겨 쓰던 말이 "비겁한 자여 그대 이름은 방관자니라"였는데, 김병곤도 친구들에게 이 말을 자주 했고, 대학 때 만든 유인물에 이 말을 집어넣기도 했다.
그러나 김병곤이 민주화운동가로 성장하게 된 것은 1971년 서울대 상과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학년 때 가입한 서클 한국사회연구회(약칭 한사연)는 그를 운동가로 담금질 하는 대장간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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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년 11월 1일, 홍제동성당에서 열린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최로 열린 시국대토론회에서 김병곤 민통련 정책실 차장이 발언하고 있다. |
| ⓒ (사)김병곤박문숙기념사업회 |
1978년 동일방직사건이 발생했을 때 김병곤은 조화순 목사가 해고노동자들과 숙식을 같이 하던 인천산업선교회 사무실에 자주 찾아갔다. 정보부의 감시 눈길이 집중돼 있는 사무실에 김병곤이 소주 한 병을 웃옷 품 속에 집어넣고 오징어 한 마리를 들고 찾아 와서는 "목사님, 술 한잔 합시다" 하면서 긴 시간을 보내고 가곤 했다고 조화순 목사는 회고한다. 열심히 싸우라는 말을 할 법도 한데 그저 부드럽게 웃으며 살벌한 분위기를 녹여 주기만 했단다. 조화순 목사는 당시 피곤에 지쳐 병색이 완연한 자신의 얼굴을 걱정해 준 유일한 청년으로 김병곤을 기억한다.
김병곤은 서울대 주류 서클의 리더였기 때문에 박석운을 비롯한 많은 서울대 학생운동가들이 김병곤을 존경하며 따랐고, 중요한 판단이 필요한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그의 생각과 말을 듣기 위해 그를 찾아왔다. 때로 의견이 다르거나 관념적이고 과격한 주장을 펴는 후배를 만날 경우에도 그는 바로 논리적으로 논파하고 배척하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차근차근 그 후배의 논리의 허점을 지적하고 끈질기게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1987년 대선 시기에 민통련 정책실에서(당시 김병곤은 장기표 정책실장이 구속되어 정책실 차장으로 민통련 정책실을 이끌었다) 함께 일했던 윤석인도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다. 당시 10여 명이 모인 한 비공식 모임에서 '누가 대통령 후보가 되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한 후배가 자기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일이 발생했다. 그러자 김병곤은 그를 뒤따라 나가 설득하고 달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고, 결국 이 모임은 아무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말았다. 다른 후배들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한편으로 불평을 하면서도 그의 인품에 대한 존경심은 더욱 커졌다.
다가온 탄압 앞에 또 다시 총대를 메다
1984년 10월 김병곤은 김근태가 의장으로 있는 민청련에 상임위원장으로 참여하면서 인생의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된다. 당시 김병곤은 고등학교 선배가 경영하는 배진산업이라는 텐트를 만들어 수출하는 중소기업에서 자리를 잡고 일하고 있을 때였다. 전두환 신군부가 1980년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집권한 뒤, 집권 4년 만에 이른바 유화조치라는 걸 통해 정치권과 사회운동에 조금 숨 구멍을 열어주었을 때다. 유화조치는 전두환 신군부의 기만적 집권연장책이었지만 그 틈새를 뚫고 김근태 의장을 중심으로 민청련이 창립되어 1년이 지났을 때였다.
김근태 의장이 김병곤을 찾아와 민청련 참여를 권유했다. 김근태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주류 학생운동 출신 일부가 민청련의 공개 운동을 "소영웅주의적이며, 결국 적들의 아가리에 운동역량을 똘똘 말아 처넣고 말 것"이라는 비판을 하고 있을 때라 당시 주류 학생운동의 대표적 선배활동가인 김병곤이 과연 제안을 수락할 수 있을 것인지 내심 걱정했다. 그러나 김병곤은 의외로 선선히 수락했다. 김근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기뻤지만 한편으로 이제 막 두 아이를 낳고 모처럼 안정된 생활을 꾸리는 후배를 대책 없이 끌어들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무거웠다. 당시의 상황을 김근태는 옥중에서 보낸 한 편지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병곤이는 참으로 선선히 수락했습니다. 오랫동안 그 대답을 가슴에 담아두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그렇게 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그 모든 것에 부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생활의 타성에 물들지 않고 언제나 자유로울 수 있는 그것은 그 밑바탕에 큰 용기가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지요.
그런 약속을 한 곳은 원효로 어디쯤인가 창고 같은 2층에 병곤이가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마루에 애들 기저귀가 치렁치렁 걸려 있었고, 문숙씨는 식사준비 한다고 종종 걸음을 치고 있었지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기쁘고 자랑스러웠지만, 동시에 가슴 저 밑바닥에서 솟구쳐오르는 아픔, 그리고 슬픔으로 옆구리가 결리는 듯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건지 뭐 대단한 계획이야 있을까만, 그래도 봉급 받아서 뭣인가 해 보려고 하고 있었을텐데 아무런 대책 없이 그렇게 떠나는 병곤이가 과연 잘하는 것이고 그것을 권하는 나는 또 무엇인가 하는 상념에 흔들렸습니다. 그날 문숙씨를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고 외면하고 앉아 있다가 게처럼 옆걸음을 쳐 나왔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영광입니다>, 거름,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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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젊은 시절 김병곤 박문숙 부부의 한때 |
| ⓒ (사)김병곤박문숙기념사업회 |
이때 김병곤이 또다시 총대를 메고 나섰다. 1985년 5월, 김병곤은 이범영과 함께 민청련 대표로 대학생들의 광주학살 원흉처단 투쟁에 함께 했고, 6월에는 각 대학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대에서 열린 '민중민주운동탄압공동대책회의' 집회에 참석해 발언했다. 정권은 이를 학생운동과 민청련 탄압의 계기로 삼았다.
김병곤은 그해 7월 18일 구속되었다. 다섯 번째의 구속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시발점으로 하여 민청련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이 이어져 김근태 의장을 비롯한 민청련 간부 전체에 대해 구속과 수배가 떨어졌다. 고난 앞에서 몸 사리지 않고 구속을 감수하는 김병곤을 회고하며 김근태는 그런 그의 감옥살이를 '진정한 용기의 별'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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