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만 여개의 코와 귀무덤, 전쟁이 남긴 섬뜩한 기록
[문운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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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성 공북문 "북쪽 임금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공경의 뜻을 표한다"는 의미를 가진 진주성 북문 |
| ⓒ 문운주 |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성 안의 관군과 주민들은 끓는 물과 화포·화살로 맞서 싸웠다. 성 밖에서는 곽재우와 최경회 등 의병들이 후방을 교란했다. 김시민은 전투 중 부상을 입고 끝내 전사했지만, 조선군은 결국 왜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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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무공김시민장군상 3만 왜군에 맞서 3,800여 명의 병력으로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조선의 명장 |
| ⓒ 문운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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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순의단 계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7만 명의 민·관·군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 |
| ⓒ 문운주 |
그의 정신이 서린 성 안을 따라 임진대첩 계사순의단으로 향했다. 이곳은 1592년 진주대첩의 승리는 물론,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7만 명의 민·관·군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순절자의 희생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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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촉석루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고려후기에 건립된 누정. 누각·조경건축물.정면 5칸, 측면 4칸. 남강의 바위 벼랑 위에 장엄하게 자리잡고 있는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 |
| ⓒ 문운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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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암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바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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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장대 진주성 서쪽 지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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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국사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진주성을 보수하고 승병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사찰 |
| ⓒ 문운주 |
다시 발걸음을 옮겨 창렬사에 이른다. 이곳은 임진대첩 계사순의단과 함께 반드시 들러야 할 장소다. 김시민, 김천일, 황진, 최경회 등 임진왜란에서 순국한 39분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충절의 공간이다.
탐방의 마지막은 국립진주박물관이다. 이곳에는 천자총통, 지자총통, 중완구, 비격진천뢰 등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무기를 비롯해 구석기 시대 주먹도끼부터 근대 형평운동 관련 유물까지 경남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아우르는 유물이 전시돼 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전시물은 '숫자로 본 임진왜란'이다. 당시 인구는 조선 약 700만, 일본 1500만, 명나라 1억 6천만 명으로 병력과 자원의 격차를 보여준다. 평균 신장은 조선 161.1cm, 일본154.7cm, 포르투갈 165.7cm로 차이가 뚜렷했다.
섬뜩한 기록도 있다. 일본 교토의 귀무덤(미미즈카)에는 조선과 명나라 사람들의 코와 귀 21만4752개가 묻혀 있다는 내용이다. 또한, 조선인이 쌀 두 가마니 값에 포르투갈 상인에게 팔려나갔다는 수치는,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 존엄이 얼마나 잔인하게 짓밟혔는지를 절감하게 한다.
모든 일정을 마친 뒤, 영남포정사 문루를 지나 다시 공북문으로 나왔다. 진주성은 단순한 유적이 아닌, 조선의 충절과 아픔이 서린 살아 있는 역사였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그 속엔 수백 년을 관통하는 시간의 깊이와 민족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 ▲ 진주성 석성(둘레 1,760m)으로 축조된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평산성. 본래 토성이던 것을 고려 우왕5년 (1379)에 석성으로 수축 ⓒ 문운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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