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 앞두고 모살당한 듯, 명동성당 장례식

김삼웅 2025. 7. 21.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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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 94]

[김삼웅 기자]

 1975년 8월 명동성당에서 열린 장준하 선생 장례미사
ⓒ 장준하기념사업회
장준하의 '의문사'는 그의 위상 만큼이나 대단히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다. 하비브의 말이나 김재규의 언행 등에서도 복잡한 배경의 일단이 읽힌다. 장준하의 '군과의 연관' 발언도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케 하는 대목이다. 장준하 의문사를 추적한 한 언론인의 기록이다.

이같은 증언이 아니더라도, 여러 관계자료들은 '장씨의 비장한 각오가 이미 예견된 것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굳이 이 자리에서 자료의 근거나 명확한 출처를 밝힐 수 없는 게 유감이나, 이 같은 대부분의 자료가 〈박정희와 장준하의 뿌리 깊은 불화관계→박정희씨의 대통령 자격에 대한 끈질긴 도전→유신체제 붕괴를 위한 민주화투쟁→박정희 대통령의 퇴진 촉구→재야 민주세력의 규합에 의한 범국민운동 전개→8·15 30주년을 기해 모종의 중대계획 결행 시도 (증언을 종합한 결과 8월 20일로 예정됐음이 확실하다)→8월 17일 의문의 실족사〉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윤재검, 앞의 글)

이와 같은 전후 사실을 종합할 때 장준하는 스스로를 희생하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일을 추진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에 '심상치 않는' 그의 행동을 추적해온 정보기관이나 어떤 특수 집단, 혹은 개인이 그가 8월 17일 등산길에 나선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절호의 기회로 삼아 실족사를 가장하여 모살(謀殺)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까지 미궁일 뿐이다.

여기에 '의문의 사나이' 김용환의 정체가 겹친다. 대학 졸업 후 10여 년 동안 6.25때 삼촌의 월북사실 때문에 취직을 못하다가 사고 뒤 당진 소재 호서고등학교 교사로 취업했다. 중앙정보부가 장준하의 정보수집을 위해 고용한 사설정보원(Private Personal Agent, 이하 'P/A')이었다는 전직 중정 요원의 진술도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장준하 사인을 둘러싸고 의문과 의혹은 한둘이 아니다. 장준하의 막내아들 장호준은 사고 당일 낮 12시~오후 1시경에 성명 미상의 남자로부터 아버지가 사고당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다른 자녀는 이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같은 전화를 받았다. 사고현장은 마을에서 상당히 많이 떨어진 산중이고, 일행은 갑작스런 사고에 겁을 먹고 누구도 마을로 내려간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물론 핸드폰 같은 것이 없던 시절이다.

시신으로 집에 돌아온 장준하는 8월 21일 오전 8시에 발인예배를 마치고 함석헌의 선창으로 〈장준하 만세, 대한민국 만세, 민주주의 만세〉의 삼창 속에 8인의 출옥동지들에 의해 영구차에 실려 마을 주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명동성당에 이르렀다. 영구를 덮은 태극기는 수일전 이화대학교에 기증했던 것을 잠시 빌려 온 중경임시정부에 걸었던 바로 그 태극기였다.
 장준하 선생 장례식 모습
ⓒ 장준하기념사업회
김수환 추기경은 강론에서 "그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죽어서 새로운 빛이 되어 우리의 갈 길을 밝혀 줄 것이다"라고 추모했다. 이어서 서남동·문동환 목사의 기도와 호상 김준엽의 인사말이 끝나고, 백기완의 선창으로 장준하, 민주주의, 조국통일만세 삼창에 2천여 명이 호응하여 명동성당을 진동시켰다. 장례식장에서 만세삼창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영구차는 퇴계로→시청앞→국회의사당→중앙청을 거쳐 몇 번이나 옥살이를 한 서대문형무소에서 잠시 머물렀다 파주군 광탄면 신수리에 예비한 묘소에 도착했다.

김몽은 신부의 하관미사, 양일동 통일당 총재의 추도사, 문동환 목사의 <우리 승리하리라>의 흑인영가의 합창, 김동길·백기완 등의 추도사에 이어 하관식이 거행되었다.

장준하가 편집위원으로 있으면서 박정권의 포악한 탄압에도 바른 말을 해 온 <씨알의 소리> 9월호는 표지 2쪽에 장준하의 사진과 〈본지 편집위원이신 장준하선생님의 서거를 애도합니다〉라고 추모했다. 다음은 이 책 편집 후기의 뒷부분이다.

숱한 과제를 앞에 놓고 민주회복 조국통일도 보지 못하고, 그를 따르던 젊은 지성들의 애끓는 사모와 뜨거운 국민의 기대도 저버린 채!

이제 선생님이 가시고 난 주변의 허탈과 적막함을 뭤으로 메꾸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선생님은 가셨어도 저희들은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두터운 애국심을

그토록 끈질긴 자유혼을

그토록 곧으신 정의감을

우리는 가슴팍에 조각하여 불멸의 성좌 뒤를 행해야겠습니다. 선생님은 가셨어도, 가심으로 영원히 저희와 함께 계실것입니다.

송악산이 보이는 파주땅 나자렛 양지에 빛이 영원하소서.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가 일어나고 한 달이 되는 9월 17일, 평소 그를 따르던 후학과 민주화운동 동지 80여 명은 약사봉계곡의 사고현장에 추모비를 세우고 계훈제의 추모비 제막, 백기완의 비문낭송 등 추모행사를 가졌다. 다음은 돌에 새긴 비문.
오호 장준하 선생! 여기 이 말없는 골짝은 빼앗긴 민주주의 쟁취, 고루 잘 사는 사회, 민족의 자주평화, 통일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장준하 선생이 원통히 숨진 곳. 뜻을 같이 하는 젊은이들이 맨 손으로 돌을 파 비를 세우니, 비록 말 못하는 돌부리 풀뿌리여! 먼 훗날 반드시 돌베개의 뜻을 옳게 증언하리라.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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