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도 안 정했는데 가이드북부터 사겠다는 직장인들
‘길 위의 스튜디오’는 발달장애인이 스스로 여행을 계획하고 떠나는 과정을 통해 삶을 배우는 자유여행 교육 프로그램입니다. 그 길 위에서 함께 만드는 추억과 성장의 기록을 공유합니다. <기자말>
[권유정 기자]
'여행을 가고 싶다'는 마음은 불현듯 떠오르는 익숙한 멜로디처럼 때때로 찾아온다. 바쁜 일상에 쉼이 필요할 때, 반복되는 일상에 새로운 자극이 필요할 때,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종종 있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짐만 꾸리면 될 것 같은 충동과 달리 진짜로 떠나는 일은 '그래서, 어디로 가지?' 하는 생각부터 막힌다.
여행지는 어떻게 고르면 좋을까. '길 위의 스튜디오: 단짝투어'의 첫 수업은 여행지를 고르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여행을 매개로 한 언어, 수학, 인간관계, 디지털 활용 등을 융합적으로 교육하고, 참가자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준비한 여행을 실행하며 사회적응 및 자립능력을 향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
'길 위의 스튜디오'는 여행사처럼 단순히 상품을 제공하고 참가자를 모집해 여행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참가자들이 직접 여행지를 선택하고, 자료를 조사하고, 일정 계획과 예산을 정하고, 예약을 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떠나는 여행을 진행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참가자들이 선택하고 실행하는 '진짜 자유여행'이다.
자기결정이 중요한 이유
상당수의 발달장애인들은 자기주도적으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해 본 경험이 많지 않다. 어른들은 미숙한 아이들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고, 본인들의 경험에 비추어 더 나은 것들을 일방적으로 제공한다. 그렇지 않아도 실패와 좌절의 경험이 많을 수밖에 없는 발달장애인들은, 타인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 익숙해지면 더욱 자기결정력이 없어진다. 자신감이 떨어지고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반대로, 작고 사소한 선택이라도 스스로 결정해 본 경험은 자존감과 자기효능감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자기결정은 단지 개인의 기호를 따르는 차원을 넘어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이자 삶의 질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가 '발달장애인이 직접 만드는 자유여행'을 진행하는 것은 여행지의 선택부터 여행의 전 과정을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에서 오는 성취감이 무엇보다 발달장애인의 자립과 성장에 커다란 밑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결정력이 약한 발달장애인에게는 '어디로 떠날까' 하는 여행의 첫걸음부터 스스로의 관심과 욕구를 돌아보며 다른 사람과 의견 조율을 통해 협력하고 소통하는 경험을 통해 삶을 연습하는 기회이다.
개인적으로 여행지를 고르는 방법은 그때그때 여행의 성격에 따라 다르다.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 목적일 때는 항공권을 검색해 특가 등 평소보다 저렴하게 나온 여행지를 고른다. 여행 시기에 날씨가 괜찮은지 정도만 알아보고, 일단 항공권을 끊은 후에 무얼 하면 좋을지 고민한다.
여행지는 기대 이상일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여행 후에 만족감은 나쁘지 않다. 여행 경비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항공권을 저렴하게 끊은 걸로, 여행에서 아쉬운 부분이 꽤나 상쇄되기 때문이다. 나는 같은 여행지를 남들보다 적은 비용으로 즐겼을 때 오는 만족감을 꽤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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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장면만으로 마음을 사로잡았던, 슬로베니아 블레드호수 |
| ⓒ 권유정 |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이다. 나는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지, 어떨 때에 행복을 느끼고, 어떤 부분은 견디기 어려운지 등등. 타인이 아닌 '나'의 기준으로 선택해야 오래도록 만족스러울 가능성이 높다.
'나'에 대해 아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많이 경험하고, 느끼고, 고민해야 알 수 있는 것이 '진짜 나'이다. 실은 그래도 잘 모르는 게 '나'이기도 하다. 타인의 시선과 나의 진심이 헷갈리기도 하고,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기도 하고, 몰랐던 '나'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순간도 있다.
신나는 소비보다는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는 숫자를 더 좋아하는 내가 여행만큼은 아끼지 않고 떠나는 이유 중 하나는 여행이 나를 알아가는 데에 아주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특히 해외여행은 타인의 시선, 일상의 무게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로서 세상을 마주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 된다.
'나'를 아는 것은 삶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나침반이다. 타인의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사회의 기준에 쫓기지 않고 진짜 나의 행복을 찾기 위한 밑거름. 13년간 박봉에, 최저임금 인상률만큼도 오르지 않는 월급을 받으며 대안학교에서 근무를 한 것은 그때 그곳에는 나를 머물게 한 행복의 요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들이 흐려지고 흩어지며 결국은 퇴사를 하게 되었지만 매일매일 내 마음을 충분히 살피고 헤아리며 한 결정이기에 13년의 세월에도, 퇴사라는 결정에도 후회는 없다. 그리고 지금, 대안학교를 떠나며 이번엔 대기업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을 접고 또다시 사무실 한 칸 밖에 없는'길 위의 스튜디오'에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 것에도 후회는 없다. 물론 언젠가 연봉 2억 원을 받고 싶다는 원대한 꿈은 있다.
어쨌든, '길 위의 스튜디오'는 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수 있고, 함께 해주는 든든한 지지자들이 있고, 그를 통해 행복해하는 친구들이 있기에 선택한 길이다.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는 미지수이고, 어떤 선택이든 장단점은 있다. 중요한 것은 선택의 기로에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것, 나를 진짜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 남들이 부러워하지 않아도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내 마음을 잘 살피는 것이다. 그리고 여행지를 고르는 기준도 '내 마음' 안에 있다.
발달장애 참가자들과 여행지를 선택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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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 취향 테스트를 통해 나와 잘 맞는 여행지를 찾아보았다 |
| ⓒ 권유정 |
사전에 여행에 대한 욕구를 조사했을 때 많은 참가자들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잘 모르기도 하고, 또 원하는 것과 여행지를 연결시키는 것도 어려워했다. 예를 들면 멀리 가는 것보다 가까운 곳에 가는 게 좋다고 하면서 가고 싶은 여행지로는 독일을 고르는 식이다.
여행 취향 테스트를 통해 여행의 목적, 거리, 숙소, 음식, 교통 등 여러 가지 조건에 대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고민해 보았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한 번도 고민해 보지 않은 부분인지라 심사숙고하며 신중하게 문항을 선택했다.
테스트 결과를 공유하며 서로의 취향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나눈 뒤 본격적으로 가이드북을 찾아 관심 있는 여행지에 대해 좀 더 탐색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가이드북의 내용을 다 파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사진 위주로 훑어보며 관심 있는 풍경, 먹거리, 놀거리 등을 찾았다. 그것만으로도 참가자들은 이미 여행지에 온 듯 들떠 있었다.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삶을 잘 즐겨야 한다
자유여행의 매력 중 하나는 여행을 떠났을 때뿐만 아니라 준비하는 기간 동안도 기대감에 행복하다는 것이다. 현재의 행복감을 좌우하는 요소 중 하나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라고 한다. 앞으로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있다면 현재의 어려움은 충분히 견딜 만한 것이 되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현재 '단짝투어' 참가자들은 대다수가 근로를 하고 있는 직장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직장, 좋은 일자리를 갖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살아가지만 인간의 삶은 그것만으로 채워질 수 없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마찬가지다. 취업은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취업에 대한 기쁨과 자부심이 슬슬 사그라들고 나면, 솔직히 직장 생활이란 즐거움보다는 힘든 날들이, 열정보다는 인내가 필요한 순간이 더 많아진다. 하고 싶은 일보다는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많고, 하고 싶지만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더 많다.
적성과 선호보다는 제한된 의무고용 분야에서 주로 일하게 되는 발달장애인들의 경우에는 더더욱 직장생활에서 내재적인 동기를 갖기 어렵다. 내재적인 동기를 부여하는데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면 외재적인 동기라도 있어야 직장생활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아마 많은 직장인들의 현실적인 근로 의욕은 '급여'에서 나올 것이다. 돈을 벌어야 생계를 꾸릴 수 있고, 원하는 소비를 할 수 있고, 친구들을 만날 수 있고, 노후를 대비할 수 있다. 자립, 여가 등에 동기부여가 되지 않으면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에 대한 의지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결국 삶을 잘 즐겨야 한다.
'길 위의 스튜디오'에서 여행을 매개로 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이유는, 참가자들이 즐겁고 행복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눈높이가 맞는 친구들과 주기적으로 만나고, 월급을 모아 여행을 떠나는 활동이 참가자들에게 행복한 추억이 되고, 내일에 대한 기대가 되어 삶을 살아가고 직장생활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기를.
그런 바람을 아는 듯 참가자들은 가이드북을 살피며 메모를 하고, 친구들에게 보여주기도 하며 '어디로 여행을 갈까'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여행지를 정하기도 전에 가이드북부터 사겠다며 덥석 지갑을 열기도 했다.
그렇지만 우리의 여행은 혼자가 아닌 '친구와 함께' 하는 여행. 나의 마음뿐 아니라 친구의 마음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함께 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타인의 마음이다.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타인의 마음 살피기
그래서 가이드북에서 찾은 정보를 바탕으로 내가 가고 싶은 여행지와 이유를 정리하고, 내가 선택한 여행에 대해 다른 친구들이 좋아할 만한 이유도 생각해 보는 활동을 진행했다. 예를 들어 '내가 가본 적 없는 여행지여서'라는 이유는 나에겐 충분한 선택 이유가 되지만 다른 친구들에게 와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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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지를 선택한 이유와 다른 친구들이 좋아할 만한 이유를 고민해 본다 |
| ⓒ 권유정 |
상대방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나와 타인의 생각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나의 생각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고, 또 타인의 생각을 귀담아듣는 것. 그래서 서로 조금씩 양보하며 함께 하기 위해 맞춰가는 과정이 우리가 여행지를 선택하고 이후 여행을 계획하는 모든 순간에 이루어진다.
여행지를 하나 선택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느린 걸음이지만 매 걸음마다 충분히 배우고 성장할 테니 우리의 여행은 그 어떤 여행보다도 멋진 여정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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