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언제 또 보는 거야?" 호주식 '워라밸'의 독특한 풍경
주 4.5일제 도입에 대한 사회적 관심사가 커져가는 요즘, 세계 각국의 노동시간과 휴가제도, 직장문화 등 고유한 '워크 라이프 밸런스'(Work-Life Balance)를 소개합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글로벌 흐름 속에서 다양한 나라들의 독특한 제도와 사회적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한국형 워라밸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도움이 될 만한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합니다. <편집자말>
[이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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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월 25일(현지시간) 호주 시드니에서 현충일인 '안작 데이'의 행진을 보는 관중들이 호주 국기를 흔들고 있다. 자료사진. |
| ⓒ EPA 연합뉴스 |
우리가 속한 부서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각자 사생활이 바쁜 탓에 부서원이 모두 모이는 날은 1년에 한 번 연말 점심 회식이다. 이 회식일을 정하기 위해 25명의 부서원은 9월부터 일정을 조율한다. 맥주를 곁들인 회식이라 자녀들 방과후 픽업을 조정하는 등 가족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연말 회식이라고는 하지만 주로 11월에 잡는다. 학교가 방학에 들어가면 직장 동료와 맥주 한 잔은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연말에는 대부분 비슷한 상황이라 회식일을 정할 때면 부서원 모두가 모인 채팅방에서는 유리한 날을 잡기 위한 눈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진다.
날짜가 잡혔다고 안심하면 안 된다. 회식할 식당이 문을 여는 날인지, 모두 함께 앉을 자리는 충분한지 확인해야 한다. 맛있는 식당이거나 다들 선호하는 좋은 날은 이미 1년 전에 예약이 끝난 경우도 많다. 시드니나 멜버른 같은 대도시에서야 일주일 내내 밤늦게까지 문을 연 식당이 많지만, 내가 사는 소도시는 식사와 술을 함께 파는 곳이 아닌 곳은 대부분 5시면 문을 닫는다.
병원에서 일하는 이들의 경우는 더 힘들다. 아이가 아프거나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일을 대신할 사람을 구하는 것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휴가나 쉬는 날 일할 사람을 미리 정해놓기도 하고, 도저히 구할 수 없을 때는 2~3배의 시급을 주고 임시 직원을 데려오기도 한다. 병원 매니저의 업무 중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직원들의 근무 시간표를 짜고 빈자리를 빠르게 채울 비상 연락망을 관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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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주 시드니의 한 마트에서 직원이 일하고 있다. 자료사진. |
| ⓒ 로이터 연합뉴스 |
노동자가 지역 사회의 공익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지역사회 봉사 활동 휴가(Community Service Leave)'도 있다. 노동자가 배심원 의무를 수행하는 경우 고용주는 일정 기간 유급 휴가를 제공해야 하는데 경우에 따라 한 달 이상일 수도 있다. 화재 진압이나 구조활동 같은 인가된 응급 활동에 참여하는 노동자에게도 휴가가 제공된다. 일반적으로 이 휴가는 무급이지만 공공 부분이나 일부 고용주는 유급으로 지원하기도 한다.
물론 모든 회사 직원이 다양한 휴가와 유연한 근무 제도의 혜택을 받는 것은 아니다. '캐쥬얼'이라 불리는 임시 직원들은 다른 직원보다 25% 높은 시급을 받는 대신 유급 휴가를 포기해야 한다. 부르면 일하고 부르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 '온콜(On-call)' 형태의 근무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소득도 일정하지 않다. 부족한 소득을 채우기 위해 여러 다른 곳에서 일하기도 하고 급하게 아이를 맡길 사람을 찾지 못해 일을 못할 수도 있다.
가장 불리한 조건은 정규직에 주어지는 연간 10일의 병가가 없다는 점이다. 캐주얼 직원은 본인이 아프거나 가족을 돌봐야 할 때 무급으로만 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 또한, 정규직은 공휴일에 유급으로 쉬지만 캐주얼 직원은 공휴일에 근무하지 않으면 해당일에 대한 임금을 받지 못한다. 유급 육아휴직 역시 정부가 지원하는 최저 임금 기준 120일 외에 고용주로부터 받는 휴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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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비스 오스트레일리아'(Services Australia)는 호주 정부의 행정 서비스 기관 중 하나로 다양한 사회복지 및 행정 서비스를 제공한다. |
| ⓒ 위키미디어 공용 |
이런 자영업자들에게 정부가 제공하는 대표적인 것이 유급 육아휴직 제도다. 정부는 이 제도를 통해 자영업자가 출산이나 입양 시 최대 120일(24주) 동안 최저임금에 준하는 유급 육아휴직 급여를 지급하는데 2026년 7월 1일부터는 26주로 확대될 예정이다. 자영업자는 최저임금뿐만 아니라 급여의 12%에 해당하는 퇴직연금 기여금도 정부로부터 추가로 받는다.
자영업자가 유급 육아휴직 제도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출생이나 입양 전 13개월 가운데 최소 10개월 동안 330시간 이상 일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수익이 나지 않는 사업일지라도 이윤 창출을 위해 노력한 시간이라면 일한 시간으로 인정되지만 과세 소득이 15만 호주달러(약 1억 3600만 원) 이상인 경우에는 이용할 수 없다. 또한, 유급 육아휴직 동안 자영업자는 사업의 일상적인 운영이나 유급 업무를 할 수 없으나 사업을 유지하기 위한 간단한 행정 업무나 감독 역할 등은 제한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
호주의 '워크 라이프 밸런스'(Work-Life Balance)는 법적 보장과 사회적 인식, 그리고 효율성을 중시하는 문화가 조화를 이룬 결과다. 야근을 미덕으로 여기지 않고 휴가를 당연한 권리로 인정하는 호주의 노동 문화는 지속 가능한 삶과 생산적인 업무 환경을 동시에 추구하는 사회적 합의에 따른 것이다. 호주인들에게 일은 삶의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니라는 인식이 확고하다.
하지만 누군가는 부러워할 휴가제도를 만끽하는 호주인들도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다르지 않다. 한 조사에 따르면 호주 직장인들은 업무 과부하, 비현실적인 마감 기한, 낮은 업무 통제권, 부족한 지원 또는 유연 근무 정책처럼 일관성 없이 정책이 적용되는 경우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역사적으로 전례 없는 수준의 변화를 경험하면서 조직 변화가 제대로 소통되지 않거나 변화가 미치는 영향이 명확히 설명되지 않을 때 직원들의 불안감 역시 커졌다.
호주에서는 오래전부터 '앱센티즘(Absenteeism)'을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앱센티즘은 정상적인 근무 시간 동안 직장에 출근하지 못한 정도를 나타내며 질병, 부상, 개인적인 이유, 혹은 직무 만족도 저하 등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할 수 있다. 앱센티즘은 흔히 프리젠티즘(Presenteeism)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프리젠티즘은 아프거나 건강 문제가 있음에도 출근해 정상적인 업무 수행 능력이 떨어져 생산성이 저하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하지만 앱센티즘을 줄이기 위해 건강관리 프로그램이나 유연한 근무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게 느껴진다. 그런 제도는 이미 호주 직장에 충분히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같이 일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좋은 휴가제도와 워라벨을 보장해 준들 함께 일하는 내 동료가 맘에 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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