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하는 남성에 대항하기, 통쾌할까 식상할까
[김성호 평론가]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소위 아트하우스 영화,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거대자본이 제작한 상업영화와 대비되는 작가주의 작품군이 이 시대 한국에서도 여전한 소구력을 발하고 있다. 일류 감독들이 OTT 서비스로 진출하고 멀티플렉스 극장조차 생존을 담보하기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아트하우스 영화가 선전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까지 하다.
올해만 해도 <서브스턴스>가 56만 명, <콘클라베>가 33만 명, 재개봉한 <더 폴: 디렉터스 컷>이 18만 명을 넘기는 화끈한 흥행을 기록한 건 다분히 상징적이다. 네오 소라의 <해피엔드>는 12만 명, 벌써 7차례나 재개봉한 <러브레터>도 10만 관객을 넘겼다. 코로나19로 독립예술영화관이 극심한 침체를 겪었던 게 불과 몇 년 전 일이 아닌가. 이대로 독립예술영화관도, 아트하우스 영화도 멸망의 길로 접어들리란 분석이 더는 소수설이 아니었던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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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코니의 여자들 포스터 |
| ⓒ 그린나래미디어 |
중소 영화 수입사들에게 어떤 영화를 들여올지는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편당 계약금이 수천만 원을 쉽게 넘어서는 상황에서 관객수가 1만 명도 넘지 못하는 흥행실패는 회사의 운영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상당한 수익을 벌어다 주는 작품군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일부일 뿐 전체 관객수가 빠르게 줄고 있다는 냉엄한 현실은 실패의 가능성을 더욱 크게 하고 있다. 연달아 몇 번의 실패를 하면 제대로 차기작을 들여오기도 어려울 만큼 내상을 입을 수도 있는 일이다. 신작 수입을 줄이거나 아예 그만두고 재개봉에 주력하는 요즈음 수입배급사들의 흔한 경향이 바뀐 생태계를 알도록 한다.
이달 개봉한 <발코니의 여자들>은 영화 관계자는 물론, 영화팬들까지 그 흥행을 주목하는 작품이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영화가 타깃 삼고 있는 관객층이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독립예술영화 애호층과 맞아떨어지는지 그 분석과 평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영화 개봉을 전후해 마주한 몇몇 영화사 관계자가 내게 이 영화의 흥행에 대한 궁금증을 드러내기도 하였는데, 나 스스로도 그 결과를 확인하고 싶었던 마음이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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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코니의 여자들 스틸컷 |
| ⓒ 그린나래미디어 |
이야기 자체도 페미니즘적 성격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주인공은 막역한 세 친구, 니콜(산다 코드레아누 분)과 루비(수일라 야쿠브 분), 그리고 엘리즈(노에미 메를랑 분)다. 서로 다른 성격과 매력을 가진 세 친구가 이웃집에 사는 잘생긴 남자와 얽히게 되며 벌어지는 소동극이 영화의 중심 줄기를 이루는데, 작품은 소동 그 자체가 주는 극적 재미보다도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뤄지는 개인과 관계의 성숙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화는 그 시작부터 살인을 내보인다. 영화의 주된 배경인 공동주택 같은 건물에 사는 유부녀가 제 남편을 우발적으로 살해하는 모습이다. 남편은 흔한 가부장적 특징은 물론이고 폭력성까지 내보이는데, 아내는 그를 더는 참지 못하고 살해에 이르는 것이다. 주된 인물들과 별다른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이 이야기는 극이 진행되면서 그대로 세 인물의 것과 맞아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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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코니의 여자들 스틸컷 |
| ⓒ 그린나래미디어 |
니콜과 함께 사는 친구 루비는 괴짜 스트리머다. 옷을 벗고 늘씬한 몸매를 드러내는 걸 주저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인터넷 생방송을 하며 이따금 모델일을 하는 것으로 소일하는 그녀다. 니콜과 루비의 집에 자주 드나드는 엘리즈는 미모의 배우로, 오래 사귄 애인에게 헌신적 연애를 이어가는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엘리즈와 루비가 니콜과 짝사랑남 사이에 좀처럼 놓이지 않을 것만 같던 오작교를 놓아줄 것만 같은 사건이 벌어진다. 사내의 주차된 차가 접촉사고를 겪은 걸 기화로 이들이 그와 말을 트게 된 것이다.
영화는 그로부터 본격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통상의 흔한 드라마라면 이로부터 니콜과 사내, 혹은 그녀보다 훨씬 예쁜 친구들과 남자가 맺는 그렇고 그런 사랑이야기로 전개될 테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사진작가인 사내가 루비에게 사진을 찍어준다는 핑계로 그녀 혼자 제 집에 남기고,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하려 드는 것이다. 그로부터 예기치 않은 살인이 벌어지고 세 친구는 사내의 시신을 처리해 친구 루비가 죄를 받지 않도록 하려는 계획에 착수한다.
도입의 살인과 이야기의 중추를 이루는 살인 모두 가부장적 남자와 여성을 성착취하는 사내를 여성이 죽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두 번째 경우엔 세 여자가 힘을 모아 사회적 규칙인 법망을 피하고 남자의 시신을 처리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우발을 넘어 저항적이다. 처음엔 그저 처벌을 피하려는 듯 보였던 이야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저항과 여성해방, 또 연대로 나아간다는 사실은 노골적이기까지 하다.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 시신을 처리하는 많은 여성들과, 가슴을 내놓고 대로변을 걸어가는 여성들, 흔한 시선에선 도저히 예쁘다고 할 수 없는 다양한 몸매를 가진 여성의 노출까지 배치하여 그 메시지를 보다 명확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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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코니의 여자들 스틸컷 |
| ⓒ 그린나래미디어 |
영화 속 남성들은 유령이 되어서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비겁자이거나, 제 애인을 가스라이팅해 지배하려는 비열한 존재다. 사회는 이들의 죄악을 제대로 차단하거나 통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성들이 직접 연대하여 이들을 무릎 꿇리고 그 죄를 묻는다. 영화 속 남성 성기를 절단하여 날린다거나 하는 장면은 선악을 가르는 일방적 설정과 맞물려 페미니즘을 숭상하는 이들에게 만큼은 일종의 통쾌함을 선사할 듯 보인다.
<발코니의 여자들>은 보는 시선에 따라 식상하고 빤하기도 하고, 해방감 느껴지고 통쾌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다. 페미니즘을 제하고 보자면 선과 악의 구도가 그저 성별에 따라 갈라지며, 연대와 적대의 구도 또한 성별로써 나뉜다는 점에서 단순하게 느껴질 수 있다.
남성들은 하나같이 여성을 착취하는 평면적 존재로 등장하며, 여성들은 결함조차 매력으로 승화돼 공감을 받게끔 묘사된다는 점이 영화가 어떤 철학과 자세 위에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지를 확인케 한다. 같은 견지에서 여성이 남성의 부당한 억압 아래 살아가고 있다는 페미니스트에겐 이 영화의 태도가 시원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발코니의 여자들>의 흥행은, 즉 이 영화가 막 살아나고 있는 아트하우스 영화 관객들에게 얼마만큼의 호소력을 발휘할 것인가는 코로나19 종식 이후 한국 독립예술영화 관객층의 요구와 욕구를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지표가 될 수 있다. 지난 20여 년 간 영화 뿐 아니라 출판, 미술, 연극, 뮤지컬, 오페라 등 대부분의 문화예술 영역의 최대 관객층이라 여겨져 온 '2030 여성'이 새로 일어나고 있는 아트하우스 영화팬의 중추를 이루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이와 같은 강성 페미니즘에 호감과 지지를 갖고 있을까. 나와 만나 이 영화를 지켜보길 권한 수입, 배급 관계자들의 시선도 이곳을 향해 있을 테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영화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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