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꾼 프랑스 군대를 쫓아낸 결정적 장소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1993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책 한 권을 들고 서울에 온다. 본디 우리 책인 '휘경원원소도감의궤 上권'이다. 경부고속철도(KTX) 사업권을 염두에 둔 유화 제스처다. 병인양요(1866) 때, 강화 외규장각에서 그들이 탈취해간 3백여 의궤 중 한 권이다. 그러면서 나머지도 '반환'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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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족산성(1872년_강화지방지도_부분) 정족산성과 전등사, 사고(史庫)와 산성 안의 진(鎭)까지 세세하게 표현하였다. 산성 서문을 나서, 길을 나타내는 붉은 실선이 선두리의 보로 연결되었다. |
|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
이듬해 '5년마다 한국 측의 임대 갱신요청'을 조건으로 145년 만에 우리 품으로 돌아온다. 소유권은 여전히 프랑스다. 약탈 문화재 천국인 프랑스로서는 매우 어려운 결정을 내린 셈이나, 빼앗긴 우리 관점에선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말 그대로 온전한 반환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KTX라는 선진기술을 도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빼앗긴 문화재를 돌려받은 건 어쩌면 행운인지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의궤는 두 나라 사이 얽히고설킨 문제의 실타래를 풀어낸 뛰어난 역사가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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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읍성(병인양요_쥐베르)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으로 종군한 화가 '장 앙리 쥐베르(Jean Henri Zuber)'의 스케치다. 강화읍성을 공격하는 프랑스군 전투 모습이다. |
| ⓒ 강화군청 |
거만한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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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궁지 강화읍 송악산 기슭에 앉은 고려궁지. 녹색의 잔디 한가운데 외규장각이 오롯하다. |
| ⓒ 강화군청 |
17일 조선 정부는 프랑스군에 문서를 보내 가톨릭의 불법성과 선교사 처형의 합법성, 프랑스 함대의 불법 침략을 이유로 철군을 요구한다. 이틀 뒤 로즈는 회답에서 선교사 학살을 비난하며 책임자를 엄벌하고, 전권대신을 파견해 수호조약을 작성해 문호를 개방하라며 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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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족산성 종해루 전등사 경내로 이어지는 정족산성 남문(종해루), 주변이 말끔하다. |
| ⓒ 이영천 |
안하무인 프랑스군을 역이용
정족산성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양헌수는 난감하다. 우선 군사 수가 너무 적다. 170여 군사라고 하나, 적군마저 얕잡아 보는 전투력이다. 타개책으로 포수들을 모집한다. 산짐승을 사냥하니 사격술과 전투력이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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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족산성 입 벌린 꼬막 같은 산세가 그대로 드러난다. 둥근 계곡 가운데 전등사가 앉았고, 납작하고 가파른 산이 남과 북쪽에서 동-서 방향으로 길다. 능선을 따라 성곽을 쌓아 무척 가파르다. |
| ⓒ 강화군청 |
양헌수는 부대를 나누어 동문과 남문 성벽에 의지한다. 포수들은 철저히 숨긴 채, 170여 정규군만 잘 보이게 노출 시킨다. 득의양양 프랑스군이 총을 쏘며 진격해 온다. 적이 근접할 때까지 포수들은 꼼짝하지 않는다. 달리는 짐승도 거꾸러뜨리는 사격술이다. 지척에 다다르자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는다. 기습이다. 수적으로 열세인 프랑스군이 자중지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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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족산성 남문 양헌수가 주력군을 매복 시킨 옴푹한 지형의 남문 주변. 낮은 계곡으로 올라오는 프랑스군을 포수들이 양쪽에서 공격했다. |
| ⓒ 강화군청 |
11월 10일 갑곶에서 함대를 빼내어, 21일 중국으로 향한다. 큰 상흔만 남긴 몇 달간의 약탈 전쟁이다.
삼랑성, 정족산 사고와 전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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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니산 정족산성 서문 옆 산정에서 바라 본 성벽과 마니산. |
| ⓒ 이영천 |
산이 입을 쩍 벌린 꼬막 같은 생김새다. 오목한 계곡이 동-서로 길게 파이고, 그 위아래를 납작하고 가파른 산이 가로막고 있다. 성곽은 산 능선을 따라 쌓았다. 사방으로 무척 가파른 성벽인 정족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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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족산 사고 1660년 12월 마니산 사고에서 실록과 서책을 옮겨 보관하였다. 왼쪽이 실록을 보관하던 '장사각'이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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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헌수 승전비각 정족산성 동문으로 들어 오른쪽에 세워진 양헌수 장군 승전비와 비각. 비석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巡撫千摠梁公憲洙勝戰碑)'가 음각되어 있다. |
| ⓒ 이영천 |
절이 무척 은은하다. 유래도 깊다. 삼국시대인 381년 창건 당시엔 진종사였다. 고려 충렬왕 때 왕비가 등불을 시주하면서 전등사가 되었다. 불법이 전해진 도량, 부처의 지혜가 전해진 터전, 극락의 등불이 있는 사찰이다. 부흥기는 역시 고려의 강화도 시대다. 천도 초기 전등사 경내에 임시 궁궐을 지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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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등산 정족산성 남쪽 봉우리에서 바라본 전등사. 은은한 절의 품격이 온전하게 느껴진다. |
| ⓒ 이영천 |
숨이 턱턱 막힐지언정 산성을 한 바퀴 돌아볼 일이다. 강화 섬 남쪽 바다와 산, 들판이 너그러이 반겨 줄 것이다. 침략에 의연했던 조선군처럼, 가파른 성벽 또한 그러하다. 갈대처럼 갈팡질팡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위로해준다. 뭍에서 강화도를 떼어낸, 멀리 유유한 염하수로가 햇살에 순간 반짝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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