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군주와 실질 군주가 달랐다... 의리로 역사를 바꾼 대왕대비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5. 7. 19. 19:30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권교체의 명장면들] 탕평정치시대와 세도정치시대 교체 성사시킨 '여군'

[김종성 기자]

임금의 살아 있는 직계존속은 거의 다 여성이었다. 임금의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임금이 죽은 뒤에는 남성 후계자가 뒤를 잇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부득이할 때는 여성 직계존속이 섭정이나 수렴청정을 했다. 이런 경우에 이 여성들은 실질적인 군주였다.

일본에서는 그런 여성들이 천황(일왕)으로 인정되는 일들이 있었다. 조선 영조 임금이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1762년에 즉위한 고사쿠라마치도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그의 남동생인 모모조노 일왕은 네 살짜리 후계자인 고모모조노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고모인 고사쿠라마치가 일단 즉위했다가 8년 뒤 조카에게 왕위를 돌려줬다.

수렴청정을 맡은 조선의 대비들이 실질적 군주였다는 점을 공식 석상에서 웅변한 인물이 있다. 정조 임금이 세상을 떠난 뒤 순조를 대신해 국정을 운영한 정순왕후 김씨가 그 점을 강조했다.
 MBC 드라마 <이산>에서 영조의 왕후인 정순왕후(김여진)
ⓒ MBC
1800년 8월 18일(음력 6.28)에 정조가 48세 나이로 눈을 감자, 닷새 뒤 순조가 열 살의 나이로 즉위했다. 이날 조정에서는 통치자 두 명의 등장을 알리는 반교문(頒敎文)이 각각 발표됐다. 하나는 순조의 즉위를, 또 하나는 55세 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알리는 것이었다. 공식상의 군주와 실질상의 군주가 동일인이 아님을 알려주는 두 공고문의 발표였다.

그로부터 3주가 경과한 9월 8일(음 7.20)이었다. 음력으로 이 날짜 <순조실록>에 따르면, 정순왕후는 대신들 앞에서 "여주(女主)로서 조정을 다스리고 있으니 저 불령한 무리들이 협잡질하고 시험해보는 습성이 과거에 비해 또 응당 몇 배가 될지 알 수 없다"며 신하들의 분발을 당부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여자 주상이나 여자 임금을 뜻하는 여주라는 표현으로 스스로를 불렀다.

그날 정순왕후가 작성한 한글 교서인 언교(諺敎)를 번역한 조정 문서에 "여군임조(女君臨朝)"라는 대목이 있었다. "여성 군주가 조정을 다스린다"라며 정순왕후를 '여군'으로 지칭하는 구절이다. 공식 문서에 이런 표현이 쓰인 것은 수렴청정하는 대비의 위상이 남성 군주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순조 즉위 당일의 상황을 기록한 음력으로 그해 7월 4일 자(양력 8.23) <순조실록>에는 일종의 매뉴얼인 수렴청정절목(節目)이 수록돼 있다. 이에 따르면, 정순왕후가 참석한 어전회의에서 순조는 시좌(侍坐)해야 했다. 순조는 정순왕후를 모시는 자세로 앉아 있어야 했다. 수렴청정하는 대비에게 최고의 위상을 부여했던 것이다.

스스로를 여주로 불렀을 정도로 권위와 권력을 가진 정순왕후는 순조가 열네 살 때까지 국정을 이끌었다. 음력으로 순조 3년 12월 28일 자(양력 1804.2.9.) <순조실록>은 "대왕대비가 수렴을 거두고 정권을 돌려주었다"고 기술한다. 일부 백과사전에는 수렴청정 종료 시점이 1803년 12월로 표기돼 있지만, 실제 시점은 1804년 2월이다. '순조 3년 12월 28일'이 음력 날짜임을 간과해서 생기는 오류다.

정순왕후가 여군·여주 역할을 한 기간은 3년 반이다. 일반적인 대비 같았으면 그 기간 동안에 어린 군주의 왕권을 지키는 일을 최우선으로 처리했을 것이다. 정순왕후도 순조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최대 관심사는 다른 데 있었다. 그는 그 3년 반을 역사를 바꾸는 데 활용했다.

71년간 이어진 탕평정치

영조가 즉위한 지 5년 뒤인 1729년부터 탕평정치가 시행됐다. 이로부터 71년간 이어진 탕평정치시대에는 '동인이니 서인이니', '남인이니 북인이니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당파를 표면상 내세울 수 없었다. 수면 밑에서 당파들이 활동하긴 했지만, 공식상으로는 탕평정부가 나라를 이끌었다.

그런데 탕평은 강력한 군주를 전제로 했다. 군주가 약해지면 당파들이 기를 펴기 마련이었다. 1800년에 발생한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 같은 탕평정치의 약점을 노출시켰다.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따르면, 정조는 1804년에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수원화성으로 옮겨갈 계획을 갖고 있었다. 아들 순조가 탕평정치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하는 준비 작업을 그 이전에 마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뜻은 이뤄지지 못했다. 이는 준비가 안 된 순조가 갑자기 왕위를 이어받고, 왕실의 최고 어른인 정순왕후가 순조를 대신해 여군·여주를 자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사도세자가 27세 때인 1762년에 죽임을 당한 것은 아버지 몰래 다녀온 평안도 여행이 '역모를 위한 사전답사'로 악의적으로 포장됐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를 그렇게 만드는 데 결정타를 던진 김귀주는 정순왕후의 오빠였다. 당시 사람들은 김귀주의 배후 인물로 여동생을 지목했다.

정조는 젊은 아버지가 뒤주에 갇히는 모습을 열 살 때 목격했다. 그가 훗날 임금이 된 뒤 가장 크게 심혈을 기울인 것은 아버지의 명예회복이다. 그런 정조가 정순왕후를 진심으로 대할 리 없었고, 정순왕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조가 꿈꾸는 개혁의 끝은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이고, 이는 사도세자의 적들이 더 이상 편히 살 수 없게 됨을 의미했다. 정조 임금과 정순왕후 사이에 대립관계가 형성된 것은 그 같은 이해관계 충돌에 기인한다.

그런 속에서, 사도세자가 그러했듯 정조 역시 어린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정순왕후의 갑작스런 집권으로 이어진 이 사건은, 71년간 계속되던 탕평정치가 와해되면서 서인당 분파이자 보수세력인 노론당이 주도권을 잡고 노론의 일원인 정순왕후의 친정이 득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세기 전반인 순조·헌종·철종시대의 특징인 왕실 외척가문의 세도정치는 이렇게 시작됐다.

정순왕후의 경주 김씨에 더해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활약한 세도정치시대에는 왕실이 무기력해지고 세도가문과 노론이 국정을 주도했다. 이 당시에는 세도가문이 왕실 비슷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왕실과 달리 세도가문은 자기 가문과 당파의 관점에서 국정을 운영했다. 그래서 대중의 입장에서는 왕실 정치보다 못한 것이 세도가문 정치였다. 이런 정치가 세상을 얼마나 힘들게 했는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 있다. '19세기는 민간의 시대'라는 말이 그것이다. 이 세기는 홍경래의 난을 비롯해 약 100개의 민란으로 점철됐다. 세상을 피폐하게 만든 이 시대의 서막을 연 인물이 정순왕후다.

왕후나 대비의 힘은 남편이나 왕자에게서 나왔다. 태조 이성계의 혈통이 아닌 여성이 왕실 일원이 되어 권력을 누린 것은 이성계의 핏줄을 이어받은 남자와 혼인했거나 그런 남자를 낳았기 때문이다.

1800년 당시의 정순왕후는 이 점과 관련해 핸디캡이 있었다. 그의 남편은 그로부터 24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이 시점에는 그를 지켜주기 힘들었다. 거기다가 그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왕자를 낳지 못했다. 그와 왕실 사람들의 관계에는 '새'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정조에게는 새할머니였고 순조에게는 새증조모였다.

그런데도 그는 강력한 여군·여주가 되어 탕평정치를 종식시키고 세도정치를 열었다. 그가 강력해지게 된 요인들이 있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연루된 일로 인해 정조와 대립각을 세운 것은 정조 반대파들이 그를 자신들의 구심점으로 인식하는 원동력이 됐다. 또 친정집인 경주 김씨 가문의 지원도 당연히 도움이 됐다.

임오의리 강조해 정치적 지각변동 도모
 화령전에 걸린 정조 어진
ⓒ 위키미디어 공용
눈길을 끄는 또 다른 요인으로 '의리'를 들 수 있다. 수렴청정기에 그는 의리를 유난히 강조했다. 이것이 그를 강하게 만드는 정치적 지각변동의 계기가 됐다.

사도세자가 사망한 해는 임오년이다. 아들을 죽인 영조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세자가 질병으로 인해 정상적이 아니었고 이로 인해 변란의 기미가 생겼기에 사사로운 정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논리를 세웠다(임오의리).

영조의 손자이자 후계자인 정조는 임오의리를 정면으로 부정할 수 없었다. 정면으로 부정하면 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되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를 계승한 자신의 정통성이 약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사도세자는 유능하고 공로가 많았다', '간신배들로 인해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악화됐다'는 등등을 부각시키는 우회적 접근법으로 임오의리를 약화시켰다.

정순왕후는 바로 그 부분을 공략했다. 그는 영조의 임오의리를 강조하는 방법으로 정치적 지각변동을 도모했다. 순조 즉위년 12월 18일 자(양력 1801년 2월 1일) <순조실록>에서 임오의리를 강조하는 정순왕후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이는 정조의 우회적 접근법을 지지했던 개혁세력의 존립 기반을 약화시키고 그들에 대한 숙청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됐다. 정조 지지세력을 '영조에 대한 불충세력'으로 몰아세우는 방법으로 정계개편을 추진했던 것이다.

정순왕후의 임오의리 강조는 정조를 못마땅히 여기는 세력의 정치적 필요에 부응했다. 이는 핸디캡을 가진 그가 그들의 응원 속에 탕평정치와 개혁정치를 무너트리며 세도정치를 여는 데 기여했다. 그는 '의리'를 앞세워 탕평정치시대와 세도정치시대의 시대교체를 성사시킨 여군·여주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