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김병곤, 사형"에 "영광입니다"...김지하도 충격 받은 장면
민청련동지회에는 민청련 활동 중 정권으로부터 당한 폭압의 결과로 활동 중 혹은 그 이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많은 이들이 있다. 그 분들의 치열했던 삶의 흔적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민주항쟁 정신의 계승에 작으나마 보탬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민청련 두꺼비 열전]을 편찬한다.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 아닌, 무명의 헌신을 실천한 이들을 위주로 한다. 이름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헌신과 열정을 보여주는 삶의 스토리를 통해 민주항쟁의 정신을 기억하는 것이 목적이다. <기자말>
[권형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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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의 서울구치소 신상기록부 |
| ⓒ (사)김병곤?박문숙기념사업회 |
"사형이 구형되었다. 김병곤의 최후진술이 시작되었다. 첫마디가 '영광입니다.' 아아! 이게 무슨 말인가? 이게 무슨 말인가?"
1974년 7월 9일 오전, 용산 비상고등군법회의 재판정에서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구형공판이 있었다. 그해 4월에 있었던 민청학련 민주화 시위와 관련된 인사와 학생들에 대한 결심공판이었다. 검사의 장황한 논고 끝에 이철, 여정남, 유인태, 나병식, 김병곤, 김지하, 유근일, 이현배 등 8인에게 사형이 구형되었다. 무더웠던 재판정 분위기가 일시에 싸늘해지고 방청석이 술렁였다.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이 시작되었다. 김지하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나는 엄청난 충격 속에 휘말려들기 시작했다. 죽인다는데, 목숨이 끝난다는데, 일체의 것이 종말이라는데, 꽃도 바람도 눈매 서글한 작은 연인도, 늙으신 어머니의 주름살 많은 저 인자한 얼굴 모습도, 흙에 거칠어진 아버지의 저 마디 굵은 두 손의 훈훈함도, 일체가 모든 것이 갑자기 자취 없이 사라져버린다는데. 그런데 '영광입니다.' 성자의 말이다. 우리가 성자인가? 사형을 집행하지 못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비꼬는 말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저들의 그 독살스러움을 잘 알고 있는 우리가 다만 집행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여 여유 있게 비꼬고 있을 그럴 처지인가? 아니다. 그러면 무슨 말인가? 그렇다. 확실히 그렇다. 우리가 드디어 죽음을 이긴 것이다. 그 지옥의 나날, 피투성이로 몸부림치며 순간순간을 내내 죽음과 싸워 드디어 그것의 공포를 이겨내버린 것이다."
김병곤과 같은 군사법정에 섰던 김지하가 김병곤의 '영광입니다'라는 당찬 진술에 충격을 받고 그 순간 머리 속을 오갔던 생각들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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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한 1974년 4월 25일자 경향신문 기사. 사진 중 둘째 줄 맨 왼쪽이 김병곤 |
| ⓒ 경향신문 |
김지하는 이 글에서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의 고문에 대해서 폭로하는 등 박정희 유신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했고, 석방 27일 만에 재구속되어 70년대 내내 옥고를 치르는 수난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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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년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동아일보>에 연재한 김지하의 <고행...1974> 중 김병곤과 관련된 내용이 실린 2월 26일자 |
| ⓒ 동아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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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년 11월 민청련 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김병곤 부의장 |
| ⓒ 민청련동지회 |
"이제 김병곤은 우리 곁을 떠나고 없다. 살아 펄럭이는 청춘을 송두리째 불의에 저항하는데 바쳤던 그의 죽음을 두고 무슨 췌언이나 미화가 필요한가? 원통하고 슬프다." (<영광입니다> 중에서, 거름, 1992.)
지금은 전설처럼 남은 '영광입니다'라는 김병곤의 이 말뜻은 그럼 무엇인가? 무엇이 영광이라는 말인가? 그에 대해서 같은 법정에서 서서 함께 사형을 구형받았던 이철은 김병곤의 이어지는 진술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검찰관님, 재판장님, 고맙습니다. 아무것도 한 일 없는 저에게까지 이렇게 사형이란 영광스러운 구형을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유신 치하에서 생명을 잃고 삶의 길을 빼앗긴 이 땅의 이 민생들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걱정하던 차에 이 젊은 목숨을 기꺼이 바칠 기회를 주시니 고마운 마음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중에서.)
진술을 마치고 돌아서는 김병곤의 얼굴은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였고, 눈빛은 너무나 평온하였다. 이철은 그 웃음과 눈빛에서 무념의 세계, 마치 열반에 든 부처님을 보는 듯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자식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어머니처럼 김병곤의 저 높은 기개는 바로 불의와 독재에 신음하는 민중에 대한 한없는 사랑에서 나왔다. 그래서 그는 사형구형 앞에서 평온하게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김병곤의 삶을 바꾼 광주대단지 사건
김병곤의 민중에 대한 사랑은 대학 입학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민중 현실과 접하게 된 최초의 사건은 1971년 8월에 발생한 경기도 광주대단지 사건이었다. 박정희 독재정권이 서울시를 개발한다며 무허가 건물을 대거 철거하면서 철거민들을 경기도 광주의 허허벌판(오늘날의 성남시)으로 강제 이주시켰고, 이에 철거민들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킨 대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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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1년 8월 10일 대규모 봉기로 일어난 광주대단지 사건 |
| ⓒ 서울역사박물관 |
1976년, 아들 사형 소식에 대한 충격으로 병석에 누웠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부득이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코리아 하이답프라는 주방기기 회사에 취직을 하면서 잠시 운동 일선을 떠났다. 그러나 1978년 동일방직사건이 일어나자 미련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운동에 복귀한다. 그는 EYC(한국기독청년협의회)에서 동일방직 사건의 실상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1979년 12월 박정희가 죽고 긴급조치가 해제될 때까지 1년 8개월간 3번째 징역을 살았다.
죽는 날까지 민중과 함께 한 삶
박정희 정권은 끝났지만 민중의 아픔을 함께하고자 하는 운동가로서 김병곤의 행보는 생애 마지막까지 계속되었다. 그의 여섯 번의 징역살이는 그런 초심의 초지일관한 실천 속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월 항쟁 이후 치러진 1987년 대통령선거 시기에 민청련 의장은 김희택, 부의장은 김병곤이었다. 김희택은 당시를 회상하며 김병곤의 큰 딸 희진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병곤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투병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 때 극진한 사랑으로 병상의 아빠를 격려하시던 조화순 목사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목사님, 제가 겪고 있는 이 극심한 고통은 이 땅의 고난 받는 민중의 고통,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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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0년 12월 김병곤 민주사회장 영결식 |
| ⓒ (사)김병곤·박문숙기념사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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