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의 딸, 마한을 품다

육성철 2025. 7. 16.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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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정은영의 <잊혀진 나라 마한 여행기>를 읽고

[육성철 기자]

 전남 영암군 내동리 쌍무덤. 마한시대 금동관이 출토된 곳이다.
ⓒ 정은영
일본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떠올린다. 2024년 개봉한 빔 벤더스 감독 작품이다. 비록 흥행에 성공하진 못했으나 중년층에서 두터운 팬덤이 형성됐다. 도쿄 시부야의 공공시설 청소부인 히라야마의 충만한 일상에 매력을 느낀 사람들이 제법 많았던 모양이다. 카세트테이프로 올드팝을 듣고 필름 카메라로 나무 사이에 비치는 햇살을 찍는다. 자전거를 타고 단골식당에 들러 술 한잔 걸치고 헌책방에서 산 소설을 읽으며 잠자리에 든다.

<잊혀진 나라 마한 여행기>(율리시즈)의 저자 정은영의 일상은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와 닮았다. 집(세종)과 일터(광주)를 오가는 도로에서 마한의 무덤과 박물관을 둘러보고 묵상에 잠기는 것이 그에겐 충만한 일상이었다. 같은 자리에서 동일한 풍경을 계속 바라보면 휘리릭 머리를 뚫고 바람처럼 지나가는 순간이 있다. 일본어로는 '코모레비',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다. 저자에게는 마한이 마음속으로 쑥 들어온 순간이다.

저자는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으로 현재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전당)에서 일한다. 전당이 들어선 곳은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들이 최후까지 항전했던 구 전남도청이다. 고려시대엔 '대황사'라는 큰 절이 있었고 이후엔 광주읍성 자리였다. 절터가 읍성이 되고 읍성이 도청이 되고 도청은 전당이 되었다. 광주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땅을 지하 4층까지 파서 조성한 아시아 최대의 복합문화공간이 저자의 근무지다.

'토포필리아(Topophilia)'라는 말이 있다. '토포스(Topos, 장소)'와 '필리아(Philia, 사랑)'의 합성어다. 저자는 과거와 현재,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른바 '역사 지그재그론'으로 마한사를 재구성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에서 "마한인들이 사납고 용맹하다"는 대목을 찾아, 임진왜란 당시 호남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천일과 고경명, 항일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민주화운동, 그리고 소설가 한강의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까지 연결한다.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다." 정의감 넘치는 마한의 후예만이 시도할 수 있는 극강의 상상력이다.
 <잊혀진 나라 마한 여행기>(율리시즈)
ⓒ 율리시즈
 마한시대 옹관
ⓒ 정은영
이 책은 답사기이면서 문화비평이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남도의 멋진 풍광을 조망하다가 어느 순간 판타지 영화에 등장하는 고고학자처럼 디테일을 파고든다. 도시개발 과정에서 흔적마저 사라진 유적지에서 고대인들의 의식주를 유추한다.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땅에서 생활사는 물론 영혼의 대화록까지 복원한다. 잡초로 뒤덮인 광주 신창동을 가리켜 "내 마음의 폼페이"라고 추켜세울 정도이니, 그것은 한반도 헤리티지에 대한 정념이자 사랑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하기 어렵다.

학창 시절 기억을 떠올려보면 마한은 진한, 변한과 묶인다. 삼국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마한은 백제에 복속되고 역사서에서 사라진다. 동서고금이 모두 그러하듯이 패자는 온전한 사서를 남기지 못했다. <후한서>에 따르면 마한은 54개 소국 커뮤니티를 이루며 번성했다. 소위 '백제국'도 마한 커뮤니티의 하나로 역사에 처음 등장한다. 이렇게 보면 백제와 마한의 관계는 어느 학자의 비유처럼 '대나무와 죽순' 또는 '동전의 양면'이었는지도 모른다. 백제 전성기에도 마한 문명이 꽃을 피웠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이 책은 지극한 정성으로 설명한다. 베일에 가려진 마한의 역사가 다시 조명돼야 할 이유이다.

저자의 고향은 전남 함평이다. 청소년기를 보낸 곳은 광주다. 마한 유적지의 상당수가 전남에 있다 보니 저자의 답사기는 일종의 추억여행이었다. 전라도가 자랑하는 향토 음식 맛집과 고즈넉함이 살아 있는 오지의 절경을 대놓고 자랑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겐 이 책이 마한 유적지를 밑자락에 깔아 둔 남도여행 버킷 리스트가 될 수도 있겠다.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 책은 그런 운명을 짊어지고 세상에 나왔다. 4년 전 <잊혀진 나라 가야 여행기>를 출간했을 때도 그랬다. 자신도 모르게 오래된 것들을 좋아하게 되는 체험, 아마도 저자가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선물일 듯하다.
 답사 중인 <잊혀진 나라 마한 여행기>의 작가 정은영. 대학에서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한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이다.
ⓒ 안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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