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 '사회적 합의' 언제까지 말만 할 건가
[정주진 기자]
14일 주요 뉴스 중 하나는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였다. 인사청문회에선 주로 보좌진 갑질 의혹이 다뤄졌지만 서면 답변 자료는 여러 가지 사회 현안에 대한 후보자의 인식을 보여주었다. 그중 하나가 차별금지법에 대한 생각이었다. 후보자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동의하냐'는 질문에 "현재 찬반 의견이 나눠진 갈등 요소가 많은 사항"이라며 "충분한 논의와 국민적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고 답했다.
이는 지난 3일 취임 30일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이 언급한 것과 단어만 다를 뿐 똑같은 말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차별금지법과 관련한 질문에 대해 "가능하면 갈등 요소가 많은 의제에 대해선 집중적, 사회적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라면서 사회적 합의가 우선이라고 부연했다. 김민석 총리도 후보자일 때 같은 말을 했다. 지난 6월 20일 BBS 라디오 인터뷰에서 "기본 입장은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어서 찬성이다 반대다 말하긴 어렵다"라며 "토론과 접점이 더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쯤이면 정부와 여당 내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질문에 대해 '갈등 사안', '사회적 합의' 두 단어를 넣은 답에 합의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인종, 성별, 출신국가, 출신지역, 언어, 장애, 종교,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등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2007년 이후 여러 차례 법안이 발의됐지만 매번 좌초됐다. 그 중심에는 보수 기독교와 보수 단체들이 있었다. 특히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강하게 반대해 온 보수 기독교는 조직적인 반대 운동과 정치권에 대한 로비 및 압력을 펼쳤다. 이런 강경한 태도를 방패 및 핑계 삼아 정부와 정치인들은 제대로 된 사회적 논의조차 시도하지 않고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시민사회단체나 언론의 질문이 있을 때면 항상 '아직은' 이라거나 '사회적 합의'가 없다는 식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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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년 10월 15일 신고리 5·6호기의 운명을 판가름할 공론조사 시민 참여단의 설문조사가 완료됐다. 충남 천안의 계성원에서 진행된 설문조사를 마친 한 시민 참여단이 박수를 치고 있다. |
| ⓒ 연합뉴스 |
공론화위원회는 평가 보고서에서 숙의 기간이 총 33일이었다고 밝혔지만 이는 사실 시민참여단 확정일부터 계산한 것이었다. 시민참여단의 종합토론, 그러니까 숙의는 10월 13일부터 15일까지 2박 3일 동안만 이뤄졌다. '이러닝 시스템'을 통해 사전 학습을 하는 기간이 있었다고 하지만 참여자들은 짧은 3일 동안 복잡한 사안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최종 결정을 해야 했다. 정부와 언론은 이 공론화가 성공적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전문가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그렇다고 이 공론화가 아예 잘못된 건 아니지만 충분한 숙의를 허락하지 않는 이런 식의 공론화는 차별금지법이라는 민감한 사회 갈등 사안을 다루는 방식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최근 몇 년 동안 시도되는 '사회적 대화'를 제안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 대화 또한 참여자들에게 충분한 숙의 시간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공론화와 같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사회적 대화는 하루 종일 진행되기도 하지만 3~4시간만 이뤄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장 모범적인 사례는 '통일국민협약' 도출을 위해 2020년과 2021년 진행된 '평화·통일 사회적 대화'인데 이 또한 시민 숙의에 허용된 시간은 연속 진행된 4일뿐이었다. 4일 동안 참여자들이 성실하고 진지하게 대화에 임하고 다양한 현안을 숙의한 건 맞지만 이는 평화통일 현안과 관련된 복잡하고 많은 주제를 깊이 토론하기엔 부족한 시간이었다. 결정을 내리지 않는 것일 뿐 사회적 대화 또한 충분한 숙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건 공론화와 같기 때문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사회적 토론 방식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민 숙의 시간이 주어져야 하고 기간 또한 충분히 길어야 한다. 충분한 숙의 시간이 필요한 이유는 참여자들이 사안과 관련 문제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도 있지만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그래야 과정과 결과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령과 성별 등 다양한 배경을 기준으로 선발되는 시민참여자들은 국민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의 논의와 의사 표명이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들의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전체 국민도 과정을 따라가면서 다양한 공간과 영역에서 같은 논의를 하는 효과가 생겨야 한다. 그렇게 과정이 이뤄지고 여론과 차이가 좁혀져야 최종 결과 또한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숙의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참여하지 못한 국민도 배움과 성찰의 과정을 밟을 수 있고 그래야만 사회적 토론이 갈등 완화 및 해결 기제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효과를 위해서는 반드시 충분히 긴 과정과 숙의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론화와 사회적 대화가 아니라면 어떤 방식이 유효할까. 가장 참고할 수 있는 건 이미 많이 알려진 아일랜드 시민의회 방식이다. 아일랜드는 시민의회 논의를 통해 낙태와 관련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수정헌법 8조의 낙태 금지 조항을 폐지했다. 대법원 판사 1명과 다양한 배경의 시민 99명으로 구성된 시민의회는 2016년 11월 26일부터 2017년 4월 23일까지 논의를 진행했다. 이 기간 동안 5차례, 한 차례에 2일 동안의 논의를 했다. 날로 치면 10일이지만 약 5개월 동안 참여자는 물론 전 국민이 낙태와 관련된 다양한 문제와 주장 그리고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사회적 논의를 했다. 시민의회 구성원 중 87%가 낙태에 찬성했고 의회는 이 결정을 받아들여 2018년 5월 국민투표에 부쳤는데 유권자 66.4%가 낙태 금지 조항 폐지에 찬성했다. 이 결과에 따라 아일랜드는 가톨릭 국가인데도 낙태를 허용하게 됐다. 가장 중요한 건 전 국민이 시민의회가 진행되는 동안 간접적으로 논의에 참여하는 기회를 가졌고 그 결과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국민투표 결과에 승복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아일랜드 방식의 사회적 논의는 시민의회를 설치한 후에 진행될 수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온 차별금지법 제정과 관련한 사회적 논의를 되도록 빨리 시작하기 위해서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처럼 국무총리 훈령에 따라 공론화위원회를 구성 및 제정해 진행할 수 있다. 이름을 무엇으로 하든 간에 핵심은 운영 및 숙의 기간을 길게 잡아 기존의 공론화나 사회적 대화와는 다르게 충분한 숙의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논의 및 결과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고 조금은 여유 있는 시간 동안 홍보와 다양한 정보 공유를 통해 전 국민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다. 결국 전 국민이 참여하는 사회적 논의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갈등 사안, 또는 사회적 합의가 없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의 기본적 인권을 외면하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계속 외면하고 유보하는 건 인권 정책의 실패를 의미한다. 특히 정부와 여당이 사회적 합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고민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합의가 없다는 이유를 대는 건 전혀 설득력이 없다. 무엇보다 국민 의견을 수렴하지도, 국민에게 토론의 기회도 주지 않고 강경 목소리를 과대 평가해 '유보' 입장을 표하는 건 무책임한 행정이자 정치라고 볼 수밖에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평화갈등연구소의 홈페이지와 블로그에도 게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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